감독 : 스파이크 존즈
꼭두각시 인형으로 마법을 부려볼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닮은 이 인형에 영혼을 깃들어줬어요. 사람들은 말하죠. 너는 다 크도록 인형을 가지고 놀뿐인 오타쿠라고. 그런 남자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고. 틀렸어요. 저는 늘 꿈을 품속 가득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요. 멋진 인형이 늘어날수록 내 품은 커지고요, 꿈의 자리도 늘어나고 있다고 믿어요. 내가 틀렸다고 하지 말아요. 원숭이와 앵무새와 어울려 사는 사람처럼,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건 내가 선택한 직업이에요. 다른 사람이 되어서라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끔 만들고 싶은... 그런 불가항력적인 나의 운명이라구요,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일은.
무언가를 조종하는 일은 내가 제일 잘하죠. 나는 그걸,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살아있게끔 만들어준다'라고 표현해요. 빈 껍데기인 채로 살아가는 건 너무 허무한 일이잖아요? 내가 그러지 않도록 돕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인형)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끔 저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저라는 사람은 누가 채워주죠? 슈와츠라는 사람은 대체 무엇일까요. 나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서 그 무언가를 돕고,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도우려고 했어요. 그 삶이 훨씬 더 나았으니까요. 나 자신으로만 존재해 있을 때 가장 불행하다고 느꼈고요. 제 옆엔 아무도 없어요. 아내 로티도, 그리고 맥신 당신도. 제가 슈와츠일 때, 아무도 저를 사랑해주지 않잖아요. 7과 2분의 1처럼, 7도 아니고 8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으로 존재해서 어중간한 사랑을 받긴 싫거든요. 층과 층 사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살아가긴 싫거든요. 그건 누구나 싫겠죠? 늘 허리를 40도 정도 굽혀서 앞이나 주변을 흘끗거리며 보는 건 정말로 싫거든요.
누구나 제가 되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모두가 내가 되어보면, 진짜 내가 누구인지 퍼즐처럼 조각조각은 알게 되지 않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다고요? 그냥 즐겁게 상상해 봐요. 인형극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거니까요.
다음은, 성형외과 의사인 도카이 씨의 생각이 담긴 글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이제 죽고 없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끊임없이 고민 속에 자신을 한동안 두기를 선택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은 다르지만 출발 지점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민의 기저에 '사랑받고 싶다'라는 마음이 존재해 있는 것도.
"나는 대체 무엇인가,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는 되풀이했다.
"어려운 의문이네요." 나는 말했다.
"그렇지요. 정말 어려운 의문입니다." 도카이는 말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확인하듯이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발언에 담긴 가벼운 야유는 아무래도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대체 뭘까요?" 그는 말을 이었다.
(...)
"어쩌면 얼마 전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을 읽은 탓도 있을 겁니다. 전쟁 중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내과의사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베를린에서 개업으로 일하던 유대인이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때까지 그는 가족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의 존경, 환자의 믿음 속에 근사한 저택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해왔어요. 개도 몇 마리 기르고, 첼로가 취미라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의 실내악을 연주했죠. 평화롭고 풍요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고 생지옥 같은 장소에 갇힙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풍족한 베를린 시민도, 존경받는 의사도 아니고, 하물며 인간이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가족과 떨어져 들개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합니다.
고명한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용소 소장이 어디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단 가스실에 끌려가는 건 면했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간수의 기분에 따라 어이없이 곤봉에 맞아 죽을 수도 있어요. 다른 가족들은 이미 살해됐을 것이고." 그는 잠시 틈을 두었다.
"그걸 읽고 나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의사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장소와 시대만 바꾸면 그대로 내 운명이 될 수도 있다 고. 만일 내가 어떤 이유로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지금의 생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끌어내려져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그저 번호뿐인 존재로 전락한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책을 덮자 깊은 고민에 빠져버렸어요. 성형외과 의사의 기술과 신용을 빼면 나는 아무 장점도 없고 아무 특기도 갖지 못한 그냥 쉰두 살 남자입니다. 아직 건강한 편이지만 체력은 젊은 시절보다 못해요. 거친 육체노동은 오래 버텨내지 못하겠죠. 내가 자신 있는 것이라고는 맛있는 피노 누아를 고를 줄 안다거나, 단골 레스토랑이나 초밥집이나 바가 몇 군데 있다거나, 여자에게 선물할 세련된 액세서리를 잘 고른다거나,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거나(간단한 악보는 한 번 보고도 칠 수 있습니다), 고작해야 그런 정도예요.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그런 건 아무 쓸모도 없겠죠."
나는 동의했다. 피노 누아에 대한 지식도,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도, 세련된 화술도, 그런 곳에서는 조금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독립기관' 중
감독 : 기타노 다케시
아직은 미숙한 두 청년의 만담. 이야기는 자주, 마사루를 바라보는 신지를 보여준다. 성향이 다른 둘이지만 이들은 자주 붙어 다닌다. 따분한 세계에서 말이 통하는 건 서로밖에 없기에. 그런데 어느 순간, 몰두하는 대상이 달라져버렸다. 신지는 복싱에, 마사루는 야쿠자에. 어떻게 보면 두 사람 다, 강해지고 싶었나 보다. 한 명은 천천히 내면의 근육을 길러서, 다른 한 명은 빠르게 표면을 사포에 갈듯 거칠게 만들어서. 몸이 담긴 환경에 맞춰가기 위해선 방식이나 성격도 조금씩 맞춰가야 한다. 시간이 들고 보면, 어느새 둘은 같은 구석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들이 애틋하다. 몰두하던 대상을 그만두었다고 시원섭섭한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이제 그 대상을 바꿀 차례, 바꾸어도 언제든 괜찮다는 뜻이다. 신지가 불안한 얼굴로 "우리 이제 끝난 걸까?"라고 물었을 때, 마사루는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라고 시원하게 대답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왜인지 그럴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에 선뜻 대답할 수 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으니까.
공교롭게도 영화를 보면서 하루키 작품이 또 떠올랐다. 단편 '예스터데이'. 그 속의 이상한 녀석 기타루와 그를 바라보는 친구 나. 분명히 이상하고 재밌는 친구로 기억하지만 당시의 나는 기타루의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지만 달라진 건, 살고 보니 나도 꽤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 '보통'이라는 모호한 기준 속에서 모호하게 존재하려고만 했었다는 것, 그것을 지금은 인정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 그 이상한 녀석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
감독 : 후보
영화 뒤 감독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더 슬펐다. 후보의 첫 장편이자 유작. 영화 속 인물들은 섣불리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진 않았다. 가족이라고 불린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외로운 건 외로운 걸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가까운 누군가가, 외롭다는 이유로 자꾸만 상처를 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영화를 보다 보면, 몇 번씩 단단히 꼬여서 풀려고 하면 엄두가 안 나는 매듭을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저마다 꼬인 매듭을 가슴속에 하나 크게 갖고 살아가는. 다만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고 비참하게 되어버려서 서로의 매듭을 발견할 수가 없다. 카메라의 앵글은 시종일관 인물을 바꿔가며 1인칭의 시점만을 고집한다. 자신의 사정만 알 뿐이라는 듯 당당하게.
웨이부, 왕진, 황링은 같은 곳을 향해 간다. 만저우린. 그곳에, 저마다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굳게 믿고. 코끼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유쳉) 동물원에 코끼리가 있는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대. 자살한 친구가 얘기해 줬어."
유쳉도 분명히 함께 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가진 못했다.
'늙으면 자연히 가족들 눈에 밟히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그 누구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대가 아끼던 개가 자신의 개에게 물려 죽이면 사과를 먼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을 애타게 부르는 아이 앞에서는 그 가족을 협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무능력을 자식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야."라고 말하는 딸에게 결코 "그게 내 탓이니?" 되려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문제는 고스란히 탑처럼 견고하게 쌓여간다. 각자 마음속의 매듭은 점점 더 단단하게 꼬여간다. 결국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나중에는 전혀 모르게 된다.
코끼리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뿌연 매연 너머로, 저 먼 산 너머로. 아직은 읽히지 않은 매듭의 끝이라도 찾아보려는 시도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