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에서 깻잎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깻잎김치, 깻잎절임, 쌈채소 바구니 속의 깻잎, 김밥 속의 깻잎...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 우린 집에서 십 분 거리의 마트에서 깻잎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깻잎 몇 장은 어디서 왔으며, 누가 옮겨주었을까? 이 깻잎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고하면 믿을 수 있을까?
깻잎은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깻잎 따기는 시간 싸움이다. 적절한 시기에, 일정 시간에 생산량을 맞춰 깻잎을 따는 일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주노동자들이다. 깻잎 한장한장에는 한때 '코리안드림'을 꿈꿨던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이 있다.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은 한국에 가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1년에 한 번만 응시할 수 있는 한국어능력시험은 동남아인들의 월급의 4할 정도이다. 경쟁률 역시 만만치 않다.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모든 합격자가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년 이내에 한국 사업주로부터 선택을 받아야 한다. 운 좋게 선택을 받아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예비 노동자들은 출국 전에 모여 8박 9일간 합숙하며 사전 취업 교육을 받는다. 교육에서는 예비 노동자들이 한국에 쉽게 적응하도록 한국의 문화를 가르친다. 그 모든 과정 끝에 이주노동자들은 '미지의' 한국 문화로 빨려들어간다.
이렇게 한국에 들어간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비닐하우스로 만들어진 주거 공간이다. 그들은 내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 투입된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산업연수생제도’라는 이름으로 3D 업종에 투입되어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연수생들은 사업주와 동료의 폭력에 시달리며 ‘현대판 노예제’의 노예처럼 취급받았다. 2004년에 고용허가제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는 일부 해결되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역시 사업장 변경 권한이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으면 사업주의 동의를 얻거나 사업주의 위반 사항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동의 해주지 않으면 일자리를 옮길 수 없는 셈이다. 또한 각종 세밀한 조항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악순환에 갇히게끔 만든다. 고용허가제는 내국인이 기피하는 한국의 사업장에 ‘젊은’ 이주노동자를 이용해 인력을 채우고, 그의 비자가 만료되면 그 빈자리를 다시 다른 ‘젊은’ 이주노동자로 채우는 단기 순환 노동 이주 정책이다.
농업 및 축산업 현장에서는 항상 인력난에 시달린다. 2009년 이후로, 이주노동자가 3년을 체류하고 재고용되면 본국에 다녀오지 않고도 1년 10개월을 더 머물러 총 4년 10개월을 일할 수 있게되었다. 왜 5년이 아닌, 꼭 '4년 10개월'인 것일까? 국적법 제5조에 따르면 5년 이상 계속해서 한국에 머물면(주소가 있으면) 영주권 신청과 귀화 자격이 주어진다. 고용허가제 비전문취업 비자로 온 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 취득 자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5년에서 두 달이 부족한 '4년 10개월'인 것이다.
4년 10개월의 체류로 인력난이 해결되지 않자, 2011년부터 본국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특별한국어능력시험을 보고 선발되면 다시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 2012년에는 한국어능력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성실근로자 제도'가 생겼다. 두 제도 덕에 이주노동자는 4년 10개월 동안 일한 뒤, 본국에 입국해서 3개월 이상 지낸 후 한국에 돌아와 4년 10개월을 일할 수 있다. 체류 기간은 최대 9년 8개월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영주권 취득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5년 이상 연속 체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가 전세계를 덮쳤을 때의 농어촌 현장 인력난은 우리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2020년, 고용노동부는 고용허가제 외국인 근로자 취업활동을 50일 일괄 연장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노동력 부족을 호소하자 2021년 4월 13일부터 2021년 12월 31일 내 취업활동이 만료되는 이들에게 1년 일괄 비자 연장을 했다.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 인력난이 불거질 때마다 단기 비자 연장으로만 대응해왔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이 인력에 얼마나 ‘의존’하는지에 주목했다. 한국의 법률상, 이주노동자가 아무리 오래 체류한다고 한들 그들은 영주권을 획득할 수 없다. 정부는 이주노동자에게 오로지 ‘인력’만을 요구한다. 그들이 한국에서 한 명의 국민으로서 살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을 하지만 정착할 수는 없으며,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빈자리를 다른 노동자가 채우게 된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영원히 일시적인’ 상태인 셈이다.
사람은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누군가의 의존은 당연시되고, 누군가의 의존은 적대시된다. 우리가 이주노동자의 ‘인력’에 의존하는 것은 돈을 지급했다는 명목으로 당연한 일이 된다. 이것이 당연시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주노동자를 ‘사람’이 아닌 ‘인력’으로 치환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인력‘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농민들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고용했고, 이후 농촌의 풍경은 달라졌다. 이전에는 할머니들을 고용해 깻잎 수확을 했지만, 농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를 고용한 이후로 할머니들 출퇴근 시켜드릴 필요도 없고, 번거롭게 점심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이가 좋지 않은 분이 있기도 해 부드러운 반찬을 해드려야 했고, 매일 똑같은 찬을 내올 수만은 없어 고심스러웠다고 한다. 또 명절이 되면 긴 휴일을 줘야 했고, 재계약을 하려면 보너스를 줘야 하는 둥 국내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였다. 또한 ‘반찬 투정’을 하거나 명절 휴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상전’처럼 구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노동환경이 어떻든 간에 ‘군말 없이’ 일했으며, 자신의 기숙사에서 점심을 각자 챙겨 먹었고, 명절 때는 ‘하루만’ 쉬고 온다. 그들은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였다.
국내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투정’을 부린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고용주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투정’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는 언어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고용주에게 감히 불만을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영원히 일시적인' 그들은 한국인 노동자들과 다른 존재, 그저 하나의 '인력'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스마일 해라’라는 사소한 고용주의 요구에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만약 이주노동자가 없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힘들어질 것이다. 천오백원짜리 마스크가 삼천원으로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편의를 위해야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는 중요한 존재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단순히 이주노동자가 하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또 다른 ‘의존’이 탄생하는 일이다. 우리의 밥상에 올라오는 모든 농산물은 이주노동자의 손길을 거친다. 우리는 그 밥을 먹고 일하러 간다. 우리의 노동은 또다시 사회를 돌아가게끔 한다. 그러나 사회는 이주노동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주노동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인력’이나 ‘고용’이란 말로 당연시되지만, 이주노동자가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들은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의존’에 불과하다.
기실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우리 사회에서 ‘대체할 수 있는 의존’은 어디에나 있다. 자본주의 사회 아래의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인력'이다. '대체할 수 있는 의존'이라는 뜻이다. 가장 간단하게 '알바'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규직, 그 밑에 비정규직, 그리고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역시 비정규직의 하나의 형태이긴 하지만, 노동자에 계급이 있다고 한다면 아르바이트는 가장 밑일 것이다. 일하길 희망하는 젊은 청년들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리 일을 잘하는 알바생이더라도 그는 결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어디에나,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비단 알바만이 아니라 어느 회사의 직원이든 동일하다. 심지어 회사의 가장 우두머리가 내일 당장 사라진다 해도 그 회사가 갑작스레 도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것마저 다른 것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향한 '인력 취급'은 비단 이주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에 이주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는 4년 10개월이 지나면 쫓아내도 되는 존재이다. 인력이 부족하면 새로운 인력을 데려오면 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나 ‘의존’이 아닌 ‘인력’으로 존재한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한국 사회가 마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한다. 오멜라스는 행복이 가득한 유토피아적 도시이다. 그러나 오멜라스의 공공건물 지하실 방 하나에는 어린 아이가 갇혀있다. 이 어린 아이는 오멜라스라는 도시의 행복을 유지하는 조건이다. 도시의 아이들은 여덟 살에서 열두 살 사이에 이 아이를 마주하고 설명을 듣는다. 아이를 본 사람들은 고민한다. 아이에게 온정을 베풀면 오멜라스를 망칠 수도 있다. 몇몇 사람들은 그 충격에 오멜라스를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나 오멜라스가 있고 어디에나 지하실 안의 어린아이가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이주노동자가 오멜라스의 어린아이처럼 한국 사회와 사람들의 온정을 기대해야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구축한 제도와 구조에 의해 당장의 처우가 결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는 사회가 인력난에 시달릴 것을 우려하며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 유지에 이주노동자는 필수 요소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손과 삶과 꿈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오멜라스의 어린아이와 같은 위치가 될 수 있다. ‘의존’ 아닌 ‘인력’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으니까. 지하실 안의 어린아이를 외면하며 연명하는 오멜라스는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참고자료]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23
공나리,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행복할 수 있을까”, 문화저널맥, 2023.01.24., https://www.thema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