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이식한 지 100일이 넘었네요. 이제 면역 글로불린은 그만 맞고 유지요법 시작합시다."
모니터로 피검사 결과를 훑으면서 교수님께서 덧 붙이신다.
"유지 요법은 원래 먹던 항암제 약 성분이랑 비슷합니다. "
'결국 효과가 좋다는 임상약 대신 나는 기존의 다른 환자와 같은 유지요법을 하게 되는구나.'
실망하기도 잠시 또 다른 걱정이 앞선다.
"얼마나 복용하게 되나요?
이전에 먹던 항암제랑 같은 성분이라면 임상적으로 내가 체험한 부작용 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손발 저림. 피가 꽉 막히는 느낌. 내 발이 내 발 같지 않던 그 느낌.
그 약을 이제 쭉 먹어야 하는구나..
"다른 의사들은 재발할 때까지 처방도 하는데 나는 3년 처방합니다. 그 이후는 그때 가서 상의해요!"
이제 관해가 되고 나니 그다음 단계들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보통 재발은 얼마 만에 하나요?"
다발 골수종을 이야기할 때 교수님은 늘 재발할 것을 기본 값으로 설정하고 말씀하셨다.
"보통 23개월입니다"
2년남짓의 시간.
처방전을 받아 들고 또다시 주사실로 향한다.
항암약을 처방하는 날만 보험이 되는 졸레닌이라는 뼈 강화 주사를 맞기 위해.
골수종은 뼈를 용해시키는 병이기도 해서 뼈가 일반인에 비해 많이 약해져 있다.
항암과 골수 이식의 과정 동안 수많은 혈관주사로 나의 혈관들은 주삿바늘 생각만으로도 도망 다니는데
또다시 혈관주사를 맞아야 한다.
항암의 부작용으로 바늘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나의 차례를 기다리며 주사 맞을 손을 내밀고 있는데
순간 부처님을 만났다!
"아가씨~ 이번 한번 더 하면 가능하겠어? 자신 없으면 손 그만 떨고 다른 간호사 불러와요"
옆의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나긋나긋하게 말씀하신다. 이미 주삿바늘을 2번이나 찔렀는데도 혈관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손녀뻘 간호사를 타이르는 부드러운 음성.
'나 같았음 인상을 팍 쓰고 째려보고 있었을 텐데.. 정말 양반이시네..'
뼈 강화 주사를 맞는 곳도 항암 주사실이다.
할아버지 링거 대에 연결된 항암제를 의미하는 노란색 비닐.
분명 항암을 하는 환자인데 항암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찰 텐데 간호사의 실수에도 너그러운 모습을 유지하신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득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분이 살아온 삶과 인성이 한눈에 보인다. 덩달아 나 또한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평균 재발되는 시간이 2년이라는 교수님의 말씀.
알고는 있었지만 또다시 나의 다리를 후 달거리게 만드는 팩트.
하지만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이 짧은 순간, 우연히 보게 된 옆자리 할아버지의 모습에 무언가 깨달음이 일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러니 삶을 긍정하자. 그 과정에서 따스해 지자.
예전에 영화에서 봤던 내용이 떠오른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루시퍼에게 반란을 일으킬 천성을 부여하셨다고 한다.
대천사였던 루시퍼는 결국 자신의 운명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지옥으로 떨어져 사탄이 되었다.
그럼 루시퍼는 매우 억울한 게 아닌가? 자신이 만들어진 대로 그는 운명을 따랐다.
그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라는 질문을 끝으로 그 영화의 장면은 끝이 났고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품으며 해답을 찾았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해답을 찾았다.
그건 루시퍼의 잘못이다.
선택을 한건 루시퍼였으니까.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진퇴양난의 순간 속에서도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들이 모여 스스로를 이룬다.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도 나의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앞으로 나를 찾아올 다음 단계의 쓰나미에도 삶을 긍정할 수 있다.
옆자리의 할아버지처럼 젠틀한 태도로.
아픔의 시간 속에서도 나의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루시퍼처럼 천성에 순응하지 않고
나는 내 운명을 뛰어넘어 보겠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왜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건지 도저히 알지 못했던 진단 직후의 나의 의문들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하여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의미 있는, 미래가 있는 그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고서는 멸망하는 내일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나는 오늘 죽는 거다 마찬가지니까.
얼마 전부터 슬로우 러닝을 시작했다
태어나서 운동이라고는 처음이다.
유지요법으로 매일 복용하는 면역억제제에 호중구(백혈구 중 면역 최전선에 있는 세포) 수가 1000 이하로 떨어지려던 찰나 시작한 운동.
달리기를 시작한 지 4주 만에 호중구수가 1700대로 올랐다!
1500부터 정상이니 이 정도면 매우 효과적이다.
여리여리 하던 다리에도 근육이 제법 붙었다.
최근 다시 일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따스한 태로를 유지하려 노력할 뿐인데
아이들에게서 받는 생기와 활력이 더욱 큰 것 같다.
건강을 위해시작한 달리기가
이제는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다.
나는 오늘도 달린다.
벅차오르는 숨을 모아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내일을 도모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희망을 그리며 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