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못 믿을 것인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런대로 사주를 자주 보게 된 것 같다.
처음 사주를 보게 된 것은 대학 2년 때 동아리 모임에서다. 당시 동아리 부경모임이 있어 임원진 회의를 하다가 한 친구가 어느 지하철에 신문팔이 형제 이야기를 했다. 그 동네에서는 유명한데 신문만 사주면 사주를 봐준다. 약간 모자란 듯한 젊은 사람인데 그들에 대한 유명한 일화 몇 가지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말자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일어나 그 지하철로 몰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우리 앞에 한 아주머니가 먼저 점을 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 다음에 나와 다른 한 명이 물어봤는데 당시 나는 막상 물어볼 말이 없어서 이렇게 물었다.
"저 잘 살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대답
"잘 살아. 좋네!"
미리 물어볼 말을 준비하지 않아 이 정도로 끝냈다.
이후 PC통신을 하게 되면서 컴퓨터 사주를 집에서 보는 것이 가능했고, 가끔 재미 삼아 보기도 하고 보험 아주머니가 찾아올 때 내 총운 사주를 미리 뽑아서 보여주면서 상담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대도 그 내용과 지금의 나의 상황이 비슷한 것 같다.
대학원 다닐 때도 가끔 어머니나 아버지가 점을 보고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는데 대체적으로 나에 대해서는 괜찮은 내용이었다.
그러면 내 인생은 정말 괜찮았을까?
대학원 다니면서 아버지가 실직하시고 빚이 많아져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빚과 아버지 병원비 등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 후에도 이런 문제로 계속 싸웠다.
회사는 출장이 많았고 아내는 직장생활과 독박육아로 항상 나와 충돌이 있었다. 결혼하고 전세금도 없어서 월세 원룸에서 시작했고 14년을 전세에 항상 빚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승진에서 바로 된 적도 없고 연봉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아 본 적도 없다. 오히려 같은 직급에서 낮게 받고 있었다. 집, 회사 문제가 한 번에 몰려오면서 우울증 걸리고 자살 충동도 몇 번 왔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집도 생겼고 중견기업에서 임원도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재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항상 발생된다. 특히 중년이 넘으면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사내 정치를 못하는 나 같은 경우.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혹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의 미래가 어떤지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만든다. 그렇지 않은가. 나이가 들수록 삶의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커진다. 안전하게 가고 싶으니 더 의존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회사의 구조조정 소식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 네이버 전화 사주를 신청했다. 그런데 상담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마음먹은 방향으로 말을 하는 것 같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도 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을 때는 무당은 나만 중심 잘 잡으면 된다고 했다. 회사에서 나가라고는 안 한다고.
그러다 회사 분위기가 달라져 내 밑에 몇 명을 자른다고 하니 힘이 빠지고 그만둬야 하나 싶어 마음이 심란해서 전화를 해 보면 이번에는 그곳과 인연이 끝났으니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한다.
이제 보니 그들은 나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 아다. 그들이 보는 공통점은 있었다. 올해 내가 좋지 않고 내년부터는 좋아질 것이라는 부분이다. 회사에 남아 있으라고 말한 사람은 올해는 안 좋지만 참고 있으면 내년에는 풀린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라고 한 사람은 올해 그 회사 떠날 인연이 되었고 내년이 이직하기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오묘하게 비슷한 듯 전혀 다른 해석이다.
사주라는 것이 통계에 의한 것이라면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큰 흐름에 의한 것이지 그날 살아가는 나에게 어떤 행동, 결정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주가 생겨난 목적은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위험은 대비하고 행운은 잘 잡아서 좋은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불안한 마음을 이용한 돈벌이가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대상자 중 하나다.
오늘 전화사주의 내용을 들으면서 나의 미래는 결정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