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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하 Apr 08. 2021

누구도 비뚤대지 않는 운동장에서

-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고

  왜 남자아이들만 운동장에서 뛰어놀까?
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을 갖지 못하지? 



  너무나 익숙해서 누구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풍경을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이 있다. 축구하는 아이들. 여기서 저기까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서로에게 공을 패스하고, 그러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젖어도 개의치 않고, 언제나 다시 뛰고 또 뛰는 아이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서로 부딪치기도 하며 각자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는 아이들. 그건 분명 눈부시게 찬란한 이미지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에 ‘여자’아이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마저도.  





  어느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 현장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운동장의 기울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자아이들이 배제된 공간으로서의 운동장을 성불평등의 맥락으로 읽어내고, 어려서부터 내면화하는 기울어진 구조를 깨부수려면 초등학생 때부터 페미니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그 논리는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무엇보다 그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에,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그런 교육이 있었다면 지금 우리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단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삶이 뭐야. 세상이 달라졌을 거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잘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동네 골목 곳곳을 뛰어다녔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얼마쯤은 뛰어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그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나중엔 아예 멈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인지 방과 후엔 남자아이들이 차지한 운동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네를 탔다. 있는 힘껏 발을 굴리면 눈앞의 운동장이 한 시야에 잡혔다. 나는 나보다 작아진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한 바퀴 돌아버린대도 전혀 놀라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 헐떡이며 다시 내려올 때까지,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늘 남자아이들로 가득한 운동장이었다.


 

  그때 왜 나는 그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같이 공을 차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달리고 싶었으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고 싶었으면서, 왜 한 번도 내가 직접 축구공을 차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을까. 서점 가판대에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처음 본 순간 끌리면서도 왠지 모를 장벽에 주춤했을 때, ‘여자 축구?’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에 대해 딱히 의문조차 갖지 못한 채로 무턱대고 책을 집어 들어 김혼비 에세이스트가 안내하는 여자 축구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인 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나는 책을 펼치기 전까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여자 축구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됐다. 읽는 중간중간 큰소리로 웃다가도 한순간에 눈물이 고여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사로잡혔다고 표현하는 편이 좋을까. 단지 축구를 시작한 것뿐인데, 그렇게 들인 ‘단지’가 그동안 저자가 구축하고 유지해온 삶의 방식을 모조리 뒤엎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과정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신이 났다. 단체 생활을 싫어하던 저자가 팀 스포츠를 하면서 타인과 마음을 맞추는 모습, 비장한 각오나 엄청난 계기 없이 어영부영 입단해 오랜 기간 꾸준히 뛰어온 여성 개개인의 사연, ‘예쁜 몸’이 아닌 ‘축구를 잘할 수 있는 몸’을 바라게 된 변화 같은 것 들은 모두 유쾌하면서도 어딘지 뭉클한 구석이 있었다.

   


  의구심 가득한 태도로 긴가민가하며 시작한 축구가 저자를 서서히 점령해 버리는 방식은 사랑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나는 남의 연애에 이토록 몰입한 적 있나 싶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매주 일정 시간을 축구에 할애하면서 겪은 저자의 경험들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와 수다스럽게 말을 걸었다. 초등학생 시절에 운동장을 가져본 적 없는 여자아이들은 신체 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란다. 그러는 동안 체력은 뚝뚝 떨어져 어느덧 만사가 귀찮아지고 계절마다 몸 구석구석이 아픈 시기를 필연적으로 맞이한다. 그러니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서 수식을 받는 ‘여자 축구’의 자리엔 여자에게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하지만 사실 좁은 틈만 겨우 보일까 말까인 다른 어떤 분야를 집어넣어도 서사는 매끄럽게 흐르고 은유는 힘을 얻을 것이다. 



  저자가 보여 주는 축구의 세계를 따라가면서 나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데 훨씬 친밀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더 단련된 신체를 갖고 매사에 의욕적으로 달려들 수 있지 않았을까. 왠지 모르게 억울한 심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단순히 내가 게을러 행동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탓하기엔 너무 복합적인 사회적 압박이 작용한 결과니까.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 같은 건 모든 성(性)에 고루 주어진 게 아니라는 걸 매순간 확인하고 있으니까.

 


  현장에서 몸으로 뛴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도 아무래도 내가 경험하기엔 여러모로 어려울 거라며 선 긋고 미리 마음을 닫아뒀던 걸까. 누구보다 피치 위에서 열렬히 뛰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4·50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깜짝 놀랐다. 선수가 아닌 일반 여자들이 만든 축구팀이 존재하고, 그들이 그라운드를 달리며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축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접할 수 있을 것처럼 동떨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건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며 거리를 두는 절망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를 발견해서 궁금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희망과 맞닿은 감정이었다. 그것도 정말이지 기절할 정도로 재밌는 세계가 있다니. 그곳에서 오로지 자신의 선택과 움직임으로 몸의 언어를 익히는 사람들이 있다니. 나 역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몸을 이끌고 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축구 하나로 인생이 바뀌고 그 변화를 주도한 저자의 이야기는 나도 그 세계에 직접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부추겼다. 

 


  그 마음이 살아난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히 의미 있고 기쁜 일이었다. 한국 땅에 여자로 태어나 알게 모르게 습득한 규칙, 고정된 성역할 속에서 내 일이 아니라고 간주해 왔던 것, 그래서 한 번도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 없는 여자 축구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어졌으니까. 우선 WK리그 경기를 관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 뛰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모르지. 그 한 번이 그다음을 불러와 무수히 많은 다음 차례를 불러오게 될지. 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여자라는 이유로 미처 알기도 전에 빼앗긴 선택권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에 힘을 보태자고 마음먹었다. 이토록 우아하고 호쾌하게 축구하는 여자들처럼. 그래서 그 어떤 여자아이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울렁거리는 일이 없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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