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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기 좋은 상황

모든 상황

by 안이서

“엄마, 나 지금 잘 거니까 엄마 퇴근해서 오자마자 나 깨워. 아마 깨 있을 건데 혹시 몰라서 전화했어.”


중간고사 기간이라 지난밤을 샜던 아이가 잠을 못 참겠는지 부탁을 했다.

가만있어 보자……, 흠, 내가 새벽 2시에 퇴근을 하니까, 그 시간이면 이 녀석 배가 고프겠지? 도시락이라도 챙겨가야 하나?

가만있어 보자, 밥을 먹으며 시험이 어땠네, 저땠네, 미주알고주알 말이 많겠지?

가만있어 보자, 그럼 난 멀뚱히 앉아서 그 말을 한 시간은 들어줘야 할 텐데.

생각해 보니 딱 술 한 잔 마실 각이잖아?

그러니 도시락이랑 컵라면도 하나 챙기고, 내 안주로는 간단하게 게맛살. 음, 좋았어!


퇴근 시간이 됐고 집에 도착했다. 방문이 쓱 열리더니 아들놈이 매우매우 피곤한 몰골로 나타났다.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 그래서 지금 자려고.”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만 홀로 거실에 남았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뭐지?’라고 내 안의 누군가가 이 상황을 ‘어처구니없다’고 평가하며 배신감도 스멀스멀 느끼게 했다.

‘나는 지 수다를 얼마든지 들어 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저렇게 들어가 버려?’


가만있어 보자!

내 가방엔 도시락, 컵라면, 게맛살까지. 안주도 완비, 술도 물론 챙겼다.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배신감까지 곁들여지니, 이보다 완벽한 술상도 없잖아?


술꾼들은 이렇게 모든 상황에 술이 당긴다. 나는 전설의 술꾼이라 언제, 어떤 상황이든지 술 마실 때로 만든다.

‘하지만 나는 술판이라는 강호에서 떠나기로 마음먹었었다. 맞아, 그랬었지?’

생각나서 다행이다.

나는 가방을 열어 컵라면은 싱크대에 놓고, 도시락과 게맛살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술도 냉장고에 넣어야겠다.

넣어야겠다. 아,

술……

.

.

.

.

……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어쩌지? 마실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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