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은 말의 크기가 아니라, 기다려주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오늘은 별일 아닌 장면들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가방을 책상 위에 잠시 올려두었다가 치우려는 순간, 누군가의 말이 먼저 도착했다. “가방은 치워주세요.”
"아,네" 라고 대답했고, 순간적으로 마음이 서늘해졌다. 잠시 외투를 벗으려고 올려놓았고,
가방을 치워야 한다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외투를 벗고 치우려했다.
마치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던지는 지시처럼 느껴졌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분명했다. 이어진 장면도 비슷했다. 일을 마무리하려던 중, 또 다른 목소리가 개입했다. 가르치려는 말투, 통제하려는 속도. 도움이라는 외피를 쓴 채 먼저 끼어드는 태도는, 의외로 사람을 가장 빨리 작아지게 만든다. 나는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 선택이 성숙이었는지, 회피였는지는 한동안 헷갈렸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싸우지 않았고, 그렇다고 굴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에너지를 지키는 쪽을 택했다.
또 일이 마무리되고 동료는 밥먹기로한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 동료는 자기 말한 시간이 맞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래요” 하고 넘겼다. 그리고 결과는 내 말이 맞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통쾌함보다 허탈함이 먼저 왔다. 왜냐하면 이기는 일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했던 건 단 하나,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및 말투였기 때문이다.
존중尊重 이란 거창한 찬사가 아니라, 상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려주는 짧은 멈춤과 상대의 말이 맞을 수 있다는 유연함 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확인 한 마디, 기다림 몇 초가 주는 신뢰는 생각보다 크다. 반대로 그 짧은 여백이 사라질 때, 마음은 이유 없이 움츠러든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뇌는 말의 내용보다 관계의 신호에 민감하다. 이미 하고 있는 일을 굳이 먼저 지적하는 말은, 도움보다 통제로 인식되기 쉽다. 의도와 맥락을 묻지 않는 지시는, 상대의 판단 능력을 잠시 삭제한다. 그때 마음속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올라온다. 이 감정은 유난이 아니라, 자율성이 침범되었다는 신호다. 무의식은 더 빠르다. 과거에 설명할 기회 없이 평가받았던 기억, 서열과 속도로 재단되던 순간들이 현재의 작은 말에 포개진다. 그래서 상황은 사소해도 감정은 커진다. 몸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느낌은 익숙해. 그리고 불편해.” 이 반응은 약함이 아니라, 경계를 인식하는 감각이다.
나는 그날 웃으며 마무리했다. 그 선택을 두고 한동안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 웃음은 침묵이 아니라 판단이었다. 싸움으로 얻을 것이 없다는 계산, 지금의 환경에서 가장 안전한 출구를 택한 선택. 때로는 맞서지 않는 것이 더 분명한 자기 보호다. 중요한 건 그 이후였다. 웃고 넘겼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감정은, 이해될 때 정리된다.
존중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존중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지금 하시려던 건가요?”라는 한 문장은, 상대를 다시 주체로 세운다. 그 한 문장이 있었다면, 오늘의 장면들은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효율을 이유로 기다림을 생략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효율은 대개 비용으로 돌아온다. 감정의 비용, 신뢰의 비용, 관계의 마찰 비용으로. 이 에세이를 쓰며 나는 내 마음의 정확한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분노도, 예민함도 아니었다. 존중의 부재를 알아차린 감각이었다. 아주 사소한 상황이였지만 그 순간 내가 존중받지 못한 감정을 느꼈나보다. 이 감각이 있다는 건, 내가 내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과연 나에게 ‘존중 받는 경험이란 무엇인가?’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질문은 한동안
내 마음속을 맴돌았다. ‘존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사전에서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으로 정의한다.
존중은 단지 예의 바름이나 격식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것, 즉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모습이나 능력, 말투나 배경 같은 외형적 기준 없이도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그 순간, 그게 바로 나에게 가장 깊은 존중의 순간이다.
내가 살면서 존중받는다고 느낀 구체적인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업무 미팅 자리에서 내 의견을 끝까지 경청해 주는 상대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당신의 말은 들을 가치가 있다’는 태도는 말보다 강한 언어였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해냈을 때 “잘했어요”, “대단하네요”라는 한마디로 나의 노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을 통해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어떤 장면보다도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 존중의 경험은 내가 이야기할 때 누군가가 진심으로 눈을 마주치며 공감해 줄 때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내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감정을 함께 느껴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존재로서 받아들여진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고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수용하는 자세에서 존중받는다고 느껴진다. 그 사람의 눈빛은 “너는 틀리지 않아”, “그럴 수 있어,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그 다름이 비난이 아닌 수용의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존중의 힘 아닐까.
예를 들어 나는 감각 피로도도 높아서 공간, 향, 소리 등 주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왔다 갔다 하고 요즘 시대에 맞지 않게 10시 30분이면 자고 새벽 5시 반이면 깨고 음식도 아무거나 먹지 못하고 요즘 현실과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특히나 한국이라는 사회에 불리한 몸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민한 몸을 “너는 참 특이해”가 아닌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해 주는 것, 이런 나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지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태도를 보면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이런 존중의 순간들이 모여서 인생의 동기부여도 생긴다. ‘나라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껴지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동기부여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존중받는 경험은 결국 ‘나를 괜찮다고 여겨 주는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하나둘씩 모일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더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자존감이 높아졌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마치 누군가의 존중을 통해 내 안에 나 자신을 믿는 마음이 자라난 듯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 모든 존중은 과연 타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서 존중을 받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나를 존중하고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감지하고 반응했지만 정작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작은 실수에 지나치게 비난하거나, 나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남의 시선에 휘둘려 나의 필요를 외면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자기 존중은 자기 자신을 믿고 스스로의 감정과 선택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다. 거절하고 싶을 땐 거절하고, 부족해도 그 부족함마저 품어 주는 태도, 나를 비난하는 대신 다독이고 나의 취향과 기준을 존중하는 삶. 내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만 타인의 존중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존중이 되어야 타인 존중이 가능하다’는 말은 그저 추상적인 문장이 아니었다. 나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기에 남도 귀하게 바라볼 수 있다. 결국 나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까지도 바꿔 놓는다.
이러한 사소한 일화는 나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가르쳤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불편해질 때, 그 감정은 나를 의심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경계를 확인하라는 신호라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