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이야기

누나, 저 아저씨 나쁜 사람 같아

by 라라미아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학교 1학년쯤이었던 어느 여름날, 엄마는 막내 남동생을 데리고 치과에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치과에 가는 김에 은행에 들러서 통장에서 돈을 찾아오라는 심부름도 함께 시키셨다. 당시에 일을 하고 있는 중이셨고 돈이 그날 꼭 필요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엄마는 반드시 동생을 데리고 치과에 먼저 갔다가 은행에 들러 돈을 찾고 버스를 탄 후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 나는 통장 주인이 아니더라도 통장에서 돈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내 맘대로 하게 했을까? 나는 평소에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편인데 사춘기에 들어서니 반항이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발걸음을 옮겼던 걸까?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은행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되니 아마도 의식의 흐름대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은행에서 돈을 찾고 동생을 데리고 치과에 갔다. 동생이 치료를 다 마치고 나서 치과 문을 나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나를 붙잡는다. 한 30분 전에 부산 은행에서 돈 찾아가지 않았냐고, 은행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돈을 다시 다 걷어가고 있다며 돈을 달라고 한다. 내가 주저하자 아빠나 엄마 어디 계시 나며 자기가 통화를 하겠다고 하더라. 마침 공중전화가 앞에 있었고 나는 아빠 회사에 전화를 걸어 아빠한테 부산 은행 아저씨가 통화를 하고 싶다고 얘기까지 하고 전화를 바꿔 주었다. 그 아저씨는 아빠한테 내가 했던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며 전화를 끊고 나서 아빠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돈봉투를 순순히 건네어주었고 이 아저씨는 나한테 자기 나쁜 사람 아니라며 사진을 찍어 증거로 가지라고 했다.

아저씨: 집에 카메라가 있니?

나: 네 카메라 있어요.

아저씨: 카메라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집에 있어?

나: 동생이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할게요.

하지만 그는 카메라가 어떤 건지 이래 저래 물어보더니 그냥 됐다고 하며 월요일에 은행에 다시 돈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고서도 나와 동생을 한참 이리저리 끌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더운 여름날 오후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을 여기저기 다니던 중 막내 동생이 나한테 소곤거렸다.

누나, 저 아저씨 나쁜 사람 같아.

그렇게 얘기하는 남동생에게 내가 한 말이 뭐였는지 아는가.

야,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야.

나보다 네 살 어린 동생 눈에도 그 아저씨의 의도가 보였던 것 같은데 왜 내 눈에는 안보였을까?

지금까지도 사람을 잘 믿는 내 성향일까, 아니면 아빠랑 통화를 했다는 믿음 때문에 애써 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 아저씨는 그렇게 사라졌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니 나는 사기꾼 아저씨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아빠는 그 아저씨랑 통화를 한 건 맞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부산 은행 누구누구입니다,라는 소리까지만 들리고 나서는 전화가 끊어졌다는 거였다. 그러니 아빠는 뭔 일이 났다 싶어 계속 집에 전화를 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엄마가 일하시는 곳에 전화를 해서 엄마가 부랴 부랴 집으로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잃어버린 것이지만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 것에 대한 꾸중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아주 오랫동안 띨띨이가 되었다.


나는 그 아저씨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멀끔하게 양복을 입고 있었던 그 아저씨.

가끔 그 아저씨는 그 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의 정립이 되는 기회였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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