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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스테라 Apr 01. 2022

동방신기 추억하기

나의 성장기를 함께한 구오빠들에게


바야흐로 2004년,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12월쯤 와와걸의 표지를 장식한 다섯명에 사로잡힌다. 

아니, 정확하게는 믹키유천에 꽂혔다. 지금봐도 저 다섯명 중에 제일 멀쩡한 건 믹키유천 뿐이다. 

펜에 펜띠를 두르고, 사물함에 유천마누라 적힌 이름표를 붙이곤 했다.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음반판매점에 가서 보아의 일본 CD와 함께 동방신기의 정규 1집 '트라이앵글'을 구매한다. 

그렇게 나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덕질은 시작되었다. 

그때 그 시절 음악방송은 보통 주말 4-5시쯤 시작됐는데 동방신기의 순서는 항상 마지막쯤이었으므로 학원 시간과 겹치기 마련이었다.

가족에게 테이프에 녹화해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학원에서 돌아와 녹화 테이프를 돌려 보는 게 일상이었다. 

언젠간 꼭 생방 뛰러 다녀야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TV앞에서 시간이 흘렀다. 

다음에 동방신기를 검색해 뜨는 팬카페는 모조리 가입했다. 

유애루비, 유천아 보여줘(유보), 아시아의 별 시아준수(아별준수), 영웅지재, sm정윤호, 심창민FCL 등등. 

최애 박유천의 버디홈피까지 찾아내 매일같이 들려 방명록을 남긴다. 



5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무지막지한 사춘기와 싸우고 있었다. 

매년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반에서 열리는 장기자랑에서 나는 겁도없이 'Rising Sun'을 신청한다. (사실 노래할 생각이었음)

반 아이들은 내가 춤추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의아해하는 반응이었고, 춤을 기대하는 친구들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다가오는 나의 순서에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사실은 준비하지 못했다는 말로 반 아이들에게 실망을 안긴다. 

라이징썬에 얽힌 이 수치스러운 기억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는 일화일 것. 

이때쯤 출연했던 예능 다 레전드였는데,, 역시 최고는 반전드라마. 


https://youtu.be/mqdrTGUpneQ


O-정반합 활동 때쯤부터 나는 몰컴을 하며 밤마다 팬픽에 몰두했던 것 같다. 

최애 커플은 유수랑 윤재. 

그 때 그 시절의 나는 책보다 팬픽을 읽으며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수많은 무대들과 예능들이 떠오르는데 해피투게더랑 여걸식스가 제일 짤이 많이 돌았던 것 같다. 


https://youtu.be/6X9ybhbQLZo


이때 학원 땡땡이치고 잠실에서 했던 드림콘서트에 갔었는데 개미떼같은 학생들 무리에 낑겨서 

4-5시간씩 서서 대기하다가 겨우 들어가서 밤 늦게 동방신기 무대를 보게 됐다. 

지금봐도 잠실운동장을 펄레드로 가득 물들인 카시오페아의 규모는 대단하다. 

드콘에 동방신기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진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는데도 동방신기 노래 나오니까 고래고래 소리지를 힘은 남아있더라. 청춘이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심각했다. 알고보니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것. 

어떤 아저씨가 가져갔다고 하는데 엄마아빠가 전화해서 찾으러 간다고 하니 알려준 주소가 무슨 산골짜기에 있는 어둑한 경비실이었다고 한다.

만약 내가 혼자 찾으러 갔다면? 아찔하다. 

동방신기를 실제로 봤던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미로틱콘 못간게 두고두고 아쉽다. 이왕 덕질 시작한 거 가까이서 얼굴은 봤어야지.  

사실 MAMA였나 MKMF시절이었나 기억은 안나는데 그 때도 한겨울에 밖에서 대기하다가 안에 인원 꽉찼다는 강친이랑 싸우다가 집에 갔었다. 


https://youtu.be/FnLrX6zzWnc



이후로는 길고 긴 동방신기의 일본 활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주로 유애루비 아니면 다음팟 동방신기 게시판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매일 올라오는 일본 무대나 예능, 짤 다 가리지 않고 찾아봤었다. 

중학생이 된 내가 신청한 제2외국어는 당연히 일본어. 교복은 스마트. 

(동복에서 하복으로 넘어갈 때 스마트 매장에 걸려있던 동방신기 대형 포스터를 떼서 집에 가져왔었다.)

일본에서의 활동은 대체로 발라드나 아카펠라 위주였고 간간히 purple line이나 summer dream같은 댄스곡이 나오는 흐름이었다. 

이때 사모은 CD의 양도 엄청났다.. 정규앨범 보다는 싱글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모으느라고 용돈 탕진했던 기억. 

중학교 때의 mp3는 아이팟 나노 2세대였는데 동방신기 폴더를 따로 만들어 내 나름의 플리를 짜서 들었었다. 

일본 화보도 예쁜게 많았어서 PINKY같은 레전드 화보들은 구매도 했었는데 이사오면서 다 버렸다..

미로틱으로 컴백했을 때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때부터 SM이 앨범으로 장난질을 시작했다. A버전, B버전, C버전으로 나눠서 판매하기 시작. 

물론 다 삼. 

우리 학교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신청곡을 틀어줬는데 매일매일 동방신기 곡을 신청하곤 했었다. 

전교에 럽인아가 퍼지던 날은 아직도 기억나는데 같이 덕질하던 친구 반에 찾아가 떼창 불렀었다. 

예능이랑 음방 모두 활발히 활동했어서 찾아볼 게 넘쳤는데 그 때의 나는 외고 준비 학원 다니느라고 너무 바빴다.

학원 시간 규제가 없던 시절이라 새벽 1시에 끝나는 날도 많았는데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항상 동방신기 노래로 위로받곤 했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이 해체했다.

내 오랜 친구는 그 날 내가 얼마나 오열하고 다녔는지 기억하더라. 내 덕질은 거기서 멈췄다. 

돌이켜보면 많은 결핍을 동방신기 덕질하면서 채웠기에 덕질에 후회는 없다. 

오랜만에 친구의 집에서 몰아본 HUG때부터의 동방신기는 여전히 빛났다. 

(물론 전과자가 된 그를 아름답게만 추억하고 싶진 않다)

화면 속에서 2000년 후반에 머물러있는 동방신기는 속절없이 나를 외로웠던 중학교 시절로 데려간다. 

폭력이 난무하던 교실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지겨운 학원에서, 대화가 없던 집안에서 그 시절 나에게 큰 위안은 어김없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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