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동네이기는 했지만 행정구역이 달라 우리 중학교에서 단 3명만 배정된 상문고등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지하철 한 정거장 차이로 갈리는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 사당역과 방배역.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직통 버스가 없어 종착지 쯤에서 지하철로 환승해야 했다. 입학한 후에는 얼마지나지 않아 학급회장 선거가 열리었다. 고등학교 학급회장 이력이 대학입시에 유리하다고 해서 안되면 말지라는 생각으로 입후보를 하였다. 나는 아직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학급회장은 중학교 때 경험해 본 바로는 특별할 것 없는 자리였다.
선거 당일 입후보한 다른 친구들을 보니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원래 이 동네 사람들인 것 같았다.
"비록 저는 아는 분이 한 분도 없지만 그만큼 중립적일 수 있고 이런 저를 뽑아주시면 말로만이 아닌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이를테면 배틀넷에서 제 아이디 친추를 해주시면 1승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것으로 연설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또 출신 중학교별로 표가 나뉘면서 운 좋게 내가 당선되었다. 나는 당선 턱으로 학급 전체에 빅맥 세트 돌릴 부모가 없다고 학급 회장이 하는 일의 본질을 훼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교과서에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는 아이들은 서초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한 행동은 8학군 학급회장선거에 이어져 내려오던 유구한 전통을 걷어찬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착각을 한 것이 아니라 오만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오만해봐야 얼마나 오만하겠느냐만은 그 지나침의 양이 같아도 돈 자랑보다 도덕적 우위를 뽐내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 일이 있은 후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수업 시작할 때 선생님께 하는 단체인사를 내가 아닌 부회장이 이끄는 것으로 바뀌었다.
"야 너는. 임마 너는 내가 교사 생활 20년하면서 너같은 꼴통 새끼는 처음 본다."
선생님은 그 학기 내내 수시로 나를 조롱했고 아이들은 늘 그렇듯이 어른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
책을 펼쳐보니 윤동주의 서시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는 교문에서 두발 단속에 걸려 미용실에 다녀온다고 하고는 오전 수업을 빼먹는 날도 생겼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학교를 그만두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한가지 공지를 내렸다. 오늘 수업이 끝나고 무상급식 신청을 받을테니까 필요한 사람은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이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었다. 나는 내 형편을 밝히고 싶지 았았다. 종이 신청서를 내는 방식으로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청할 사람들만 교실에 남는 방식으로 진행될까봐 겁이 났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아있을 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담임선생님이 입을 열였다.
"급식 신청할 사람 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고 아버지는 안 계신 것이나 다름이 없는 민수를 보니 애써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휴 비겁한 놈.'
나는 내가 민수에게 가지는 감정을 내게 가지는 것이 싫은 나머지 들지 않았어야 할 손을 들었다.
민수 아버지는 중고차 딜러로 차를 팔기보다는 판매용 벤츠를 몰면서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민수와 나는 서로를 잘 알 수 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좀 더 세심했다면 달라졌을까? 아마 그랬다면 한동안은 더 버틸 수 있었겠지만 어차피 우리들은 민물고기였고 방배동은 바닷물이었다.
민수 말고도 내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준수 선배였다. 준수 선배는 1년 선배로 서클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서클 활동은 나에게 약간의 위안이 되고 있었다. 교실에서의 상황을 여기 친구들은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수 선배는 서클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이것보라고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터미네이터 2의 액체 로봇같은거야."
"벡터가 뭔지 아니? 각 점의 좌표만 지정하면 그 사이의 공간을 다 컴퓨터가 메꿔주는거야.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완벽한 선이 되는거지!"
사실 준수 선배는 만날때 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바빠서 내 이름도 기억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내게는 더 편했다.
"이거 봐라 30만원 벌었다."
"뭘로 벌었어요?"
"내가 전에 보여준 포스터있지? 그걸 공모전에 냈더니 대상을 받았어."
"컴퓨터로 만든 그림이 상을 받았어요?"
"그럼 사람은 절대 이렇게 못그리거든."
준수 선배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17살에 30만원을 벌 수 있게 하는게 저 기술이라면 무조건 배워야했다.
사립고등학교인 상문고등학교는 1994년 학생부성적 조작과 공금횡령이 적발되어 교장 상춘식과 그의 아내인 이사장 이우자씨가 구속되었는데, 처벌 후 2년이 지나면 다시 학교로 복귀할 수 있다는 당시 사립학교법의 조문에 근거하여 2000년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