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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삼팩토리 Sep 21. 2022

[인터뷰] 일한다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베를린 프라운호퍼 HHI 연구소의 최정환 박사

독일에는 다양한 기초·응용과학 연구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프라운호퍼연구협회(Fraunhofer Gesellschaft)에는 독일 전역에 74개의 연구소가 속해 있으며, 2만 8000여 명의 직원이 있는 유럽 최대의 응용 기술 연구 개발 조직이다.


정밀과학기기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독일의 물리학자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의 이름을 따서 1949년 독일 뮌헨에서 처음 세워졌다.


설립 당시 바이에른, 헤센, 뷔템베르크 주의 협력으로 103명의 직원으로 시작하였고, 1952년에 독일 연방 경제부가 프라운호퍼협회를 독일연구위원회(DFG, 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와 함께 독일 연구 사업을 위한 3대 비대학 기관으로 지정하면서 독일 응용과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연구소 중 하나가 되었다.



총 연간 연구 예산은 28억 유로(한화 약 3조 9천억 원)에 달하며, 기본적인 연구 자금은 독일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지원하는 정부출연 연구소이지만, 70% 이상의 연구 자금이 민간 기업 및 정부 과제 위탁 연구를 통해 마련된다.


즉, 타 공공연구소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정부로부터의 기초 재정 지원 비율이 낮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 비용을 산업계 혹은 공공 연구 위탁자들의 위탁연구비 및 서비스 제공료 등의 자체 수입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를 프라운호퍼 모델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유한 재정 모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프라운호퍼는 모든 종류의 산업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상용화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혁신의 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는 연구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체 R&D 부서를 갖추고 있지 않은 중소·중견기업들의 연구를 위탁받아, 특정 기술과 공정을 개발하고 이를 최적화하며, 제품 개발 시 시제품 제작 및 소량 생산까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의 중요한 파트너이기도 하다.


프라운호퍼 협회는 현재 6800개 이상의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9년에만 733개의 발명품이 등록되었고, 그중 623개의 특허를 출원하였다. 매일 평균 2개의 특허가 출원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다.


프라운호퍼에서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특허 출원품은 오디오와 비디오 코딩 기술 분야이다. 프라운호퍼 집적회로연구소(Fraunhofer-Institut für Integrierte Schaltungen, IIS)가 1992년 개발한 오디오 압축 기술 ‘MP3’는 사용권이 만료된 2017년 4월까지 매년 평균 1억 유로(한화로 약 1250억 원)의 로열티 수입을 올렸다. 


아울러 실시간 동영상 재생(스트리밍 비디오), 동영상 압축(AAC 비디오 코딩) 등의 핵심 기술은 베를린의 프라운호퍼 하인리히 헤르츠 연구소(Fraunhofer Heinrich-Hertz Institut, HHI)에서 개발되었다.


프라운호퍼 HHI의 집적회로 설계 (IC Design) 그룹을 이끄는 그룹장 최정환 박사를 만나, 프라운호퍼 HHI에 대한 소개를 듣고 독일 최고의 연구소에서 종신 연구원으로 일하는 과학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삼성에서의 값진 경험

베를린 프라운호퍼 HHI 연구소의 최정환 박사 ©️Fraunhofer HHI


최정환 박사는 2011년 프라운호퍼 HHI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석사과정을 밟으며 동시에 삼성종합기술원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반도체 관련 분야의 학문과 실무를 겸비할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반도체 개발 시설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석사 졸업 후 삼성에서 계속 일할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당장 일을 시작하면 길어야 10년 정도를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고민했다.


마침 독일 뮌헨의 인피니온(INFINEON)에서 인턴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를 통해 ‘독일은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정보를 접하고, 독일 유학을 위해 관련 분야 교수님 28명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연구 분야를 소개하고, 박사과정 진학 의사를 밝혔다. 준비 기간이 길지 않아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교수들에게 연락하였는데 놀랍게도 세 군데의 대학에서 오퍼를 받았다.


그중 뮌헨 공대의 전기공학·정보기술학부의 고주파기술연구소(Technische Universität München, Fakultät für Elektrotechnik und Informationstechnik, Lehrstuhl für Hochfrequenztechnik, TUM HFT)로 입학하기를 결심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독일어를 전혀 모른 채로 박사과정을 시작했지만, 최 박사를 받아 준 지도 교수는 최 박사의 입학을 무척 반겼다고 한다. 당시 삼성종합기술원이 미래 5~10년 이후를 내다보고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도체 분야에서는 상당히 앞서가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지도 교수는 최 박사의 석사 프로젝트 내용을 보고 ‘석사과정에서 당신처럼 많이 배우고, 경험한 사람은 처음이다.’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후 최 박사는 ‘광통신 전자회로’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과정을 순조롭게 마치고 다시 삼성으로 돌아가 2011년까지 삼성전자 연구소에서 일했다.


삼성에서 일하면서는 본인의 분야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 기술 모니터링을 해야 했다. 연구뿐만 아니라 기술 분야의 기획도 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과학 기술에 관한 공부가 필수였다. 매주 그 내용을 A4 한 장으로 요약해서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에 관해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방식이 지금까지도 최 박사가 스스로 혁신하기 위한 공부 방식이다.


R&B&D 역량을 고루 발휘해야 하는 프라운호퍼 HHI의 생활


최 박사는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해나가면서, 국제무대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나노 쪽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이를 위해 미국 동부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을 물색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삼성에서 했던 마지막 프로젝트가 베를린 프라운호퍼 HHI와 딱 맞아떨어져서 이력서를 보낸 지 7시간 만에 프라운호퍼 HHI로부터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프라운호퍼 HHI는 모바일 광대역 통신, 광통신망 기술, 멀티미디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연구소이며, 특히 비디오 코딩 분야에서 MPEG, ITU-T VCEG, DVB 및 IETF 등의 국제표준화를 선도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모바일 장치에서 비디오 코덱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회사는 프라운호퍼 HHI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삼성, LG, 샤오미와 같은 회사들이 가장 큰 고객사 중 하나다.


베를린 프라운호퍼 HHI 연구소, 동그란 돔이 있는 옥상에서 베를린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Fraunhofer HHI

최 박사에게는 기업 연구소에서의 경험이 프라운호퍼 HHI의 업무에서도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다. 프라운호퍼는 정부출연연구소이기는 하지만 연구원의 역량은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위탁 연구를 받아오기 위한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발휘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연구 이외에 보통 부차적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일이 프라운호퍼에서는 필수 업무였다. 제안서 작성, 콘퍼런스 참여뿐만 아니라 기술 분야 전시회 참여 등을 통해 인텔, 퀄컴, 삼성 등의 글로벌 기업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고, 학회에서의 비즈니스 면담도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프라운호퍼 내부적으로 홈페이지 접속 통계 분석 등을 통해 기업, 대학, 연구소 등의 니즈를 파악하고 기술 수요를 바탕으로 한 세일즈도 진행해야 했다.


여기에 공공연구소이니 석·박사 학생들을 양성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이처럼 프라운호퍼의 생활은 기업 못지않은 치열함이 있다. 그 때문에 프라운호퍼의 이러한 스타일과 잘 맞지 않는 연구자들의 경우는 중도에 이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최 박사는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프라운호퍼의 생활에서 배우는 점이 더 많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공공연구소의 연구원들이 흔히 ‘워라밸’을 지키며 편하게 일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이곳 프라운호퍼에서 잘하는 연구원들을 보면 ‘일=생활’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고.


최 박사는 “이는 한국에서의 야근, 초과근무와 그 결이 다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압박감에 못 이겨 일하는 것이 아닌 연구원으로서의 일종의 직업적 ‘소명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최 박사는 “그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 분야에 즐겁게 몰두하며 연구를 위한 활동에 진심”이라며, 10년간의 프라운호퍼 생활 동안 그 또한 소명의식을 자연스레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두툼한 공부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만남을 통해 배운다. 


최 박사는 오랫동안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재독과협)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재독과협은 1973년 만들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기술자협회로 각 기술 분과가 세부적으로 나누어져 전문 분야별 과학자들의 네트워킹이 활발하다.


특히 최 박사는 한국 과학자들 간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재독과협이 이러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최 박사는 “모든 기술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앞서가고 있다.”이며, “재독과협 네트워킹을 통해 트렌드를 배우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최 박사는 프라운호퍼에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하고, 잘하는지를 아는 네트워킹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재독과협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박사를 인터뷰하는 내내 에너지와 생기가 가득했다. 이는 매일 새로운 영역에 관해 공부하고, 새로운 만남을 기뻐하며, 일을 즐길 줄 아는 그의 직업적 소명의식 때문이 아닐까. 


* 이 글은 <사이언스타임즈>의 ['독'일의 '한'국 과학자들]에 기고하였습니다. 



이은서

eunseo.yi@123factory.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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