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상징이 스타트업 성지로,베를린
저렴한 물가와 지원책으로 스타트업 모여…생태계 만드는 팩토리베를린의 역할
10년 전, 베를린으로 유학을 왔을 때만 해도 ‘세상 이렇게 심란한 동네가 독일의 수도라니!’ 하는 충격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배경이 된 베를린의 지하철 1호선은 1902년에 첫 개통을 했는데, 체감상 시설이나 분위기가 그 시대에서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지하철역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는 대부분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맡는 익숙한(?) 냄새가 진동했고, 곧이어 그 냄새의 근원이 길맥(길에서 맥주병을 들고 다니며 마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곳이 맥주의 나라였지!’ 하고 뒤늦게 깨달으면서도 공급되는 맥주에 비해, 제공되는 공중화장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나는 지하철 1호선의 중간쯤에 있는 괴얼리처 역(Görlitzer Bahnhof) 근처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역에 내리면 담배피는 사람들 사이에서 풍기는 독특한 식물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등하교를 했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베를린의 냄새이고, 그림이고 분위기였다.
베를린은 스타트업 중점 육성 도시로 발돋움했다. 여기에는 ‘팩토리 베를린(Factory Berlin)’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진=Factory Berlin홈페이지베를린이 힙하기만 하다고? 다시 정의 되는 "힙"
하지만 그런 곳들이 겪어왔던 것처럼 베를린도 어김없이 힙 플레이스로 명명되고,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게 되었다. 서울의 홍대나 연남동처럼 급격하게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베를린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동서독을 가르던 장벽이 있던 곳은 오랜 시간 동안 유휴지였다. 이곳에 가장 먼저 새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고, 동네마다 있던 특색있는 작은 가게들 대신, 프랜차이즈 카페와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가난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산업 영역에서 베를린이 가진 색깔을 부각하면서 스타트업 중점 육성 도시로 발돋움한다. 뮌헨, 슈투트가르트,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등 자동차, 금융, 제약 등 각기 특성 산업을 가지고 있는 도시에 비해 베를린은 그저 정치의 중심지, 통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도시였다. 기존의 산업들이 여기에 옮겨올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신산업,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산업군, 디지털화 등과 관련한 스타트업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저렴한 물가와 국제적인 분위기, 동시에 베를린시의 전폭적인 지원 정책도 한몫했다. 이렇게 베를린의 스타트업 산업은 천천히 성장하여, 2020년까지 약 681개의 스타트업이 베를린에 생겨났고, (그림1)
독일 전역에서 가장 스타트업이 많은 도시가 된다. 스타트업 전문 조사기관 startupdectator 에 따르면, 베를린에 있는 스타트업 681개 중 477개가 정부, 전문 투자기관 등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이 지원 기회 또한 전국에서 가장 풍부하기 때문에 많은 스타트업들이 베를린에서 시작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림2)
이제는 스타트업의 중심지 베를린
베를린을 예술과 스타트업의 접점이 되는 도시로 만든 데에는 팩토리 베를린(factory berlin)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팩토리 베를린은 동서독을 나누던 장벽이 있던 베르나우어 거리의(Bernauer Strasse)에 있던 맥주 양조장을 개조하여 만든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팅 기관이자 코워킹 스페이스이다. 2014년에 문을 열어 초기에는 구글, 트위터, 우버 등 글로벌 기업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지멘스, 아우디, 도이치은행 등의 기존 독일의 대기업 혁신사업팀 등의 사무실이 입주하면서 큰 화제를 불러왔다. 이곳에서 유럽 최대의 디지털 은행 N26이 탄생하였고, 밀키트 사업으로 미국까지 진출한 Hello Fresh 등의 유명 스타트업들이 거쳐 갔다.
팩토리 베를린은 예술가 앤디 워홀이 본인의 작업실을 지칭했던 ‘팩토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혁신을 이끌어가는 기업가 정신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예술가적 감수성과 창의성, 자유로움’ 이라는 것이 그 이름에서 드러난다.
팩토리 베를린은 다양성을 고려하여 입주자들을 선정한다. 사진=Factory Berlin 홈페이지실제로 이곳에는 예술가들도 입주해 있으며, 매년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예술가를 지원하고, 예술가들과 기업가들의 콜라보레이션을 돕기도 한다. 또한 대기업, 중소기업,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1인 기업가부터 프리랜서까지 다양한 형태로 혁신을 꾀하는 사람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을 수 있도록 비율을 고려하여 입주자들을 선정한다.
예술+젊은,혁신적임=스타트업의 성지 베를린
이처럼 베를린은 기존에 가진 예술의 도시라는 이미지에 ‘젊은,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이미지까지 더해져 전 세계의 많은 창업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된다. 더불어 팩토리 베를린도 승승 장구하여, 2017년에는 괴얼리츠 공원 끝 자락에 두 번째 캠퍼스를 열었고, 2021년 여름에는 Factory Hammerbrooklyn 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르크에도 세 번째 캠퍼스를 오픈할 예정이다.
베를린은 공유 오피스의 중 대표 격인 위워크 지점이 10개나 있을만큼, 그 수요가 많은 도시이다. 하지만 팩토리 베를린은 CEO 니코 그라멘츠(Nico Gramenz)말에서 분명한 차별점을 보여준다. ‘단순히 일할 사무실을 찾고 있다면, 팩토리에 잘못 오신 겁니다.’ 위워크에 입주하려면, 등록하고 월 이용료만 지불하면 되지만, 팩토리 베를린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사업계획서를 담은 가지 소개를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생태계에 기여하고, 네트워킹을 통해서 서로 성장할 사람들을 선별하여 입주 기회를 준다.
2017년 괴를리츠 공원 끝 자락에 문을 연 팩토리 베를린 두 번째 캠퍼스. 사진=Factory Berlin 홈페이지
가장 무심하게 신경 쓰지 않은 듯 옷을 입고, 세상 시간 많은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며 길에서 맥주병을 들고 클럽을 향하는 것이 가장 힙했던 2010년 대의 베를린이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팩토리의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는 얼토당토 않을지라도 자기만의 아이디어로 일을 벌이고, 사람을 모으고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베를리너들이 ‘힙'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니 ‘팩토리 베를린'이 유명하다 들어서 방문을 청한 한국 분들이 와서 하는 말이, ‘다들 밤을 새웠는지 초췌해 보이네요. 생각보다 안 힙하고, 신림동 고시촌이랑 느낌이 비슷해요.’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나는 계속 팩토리 밖의 관찰자로 있다가, 2020년 초에 한국과 독일을 연결한다는 사업 아이디어를 제출하여 팩토리에 입주하였다. 연재를 통해 팩토리 베를린뿐만 아니라 베를린과 독일 스타트업 씬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려고 한다. 힙보다는 핫하게 치열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좌충우돌 경험담을 들려주며, 독일 정부의 지원 내용 등 각종 국가 정책들을 살펴보며 한국에 있는 창업가, 기업가들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이 이 글의 목표가 될 것이다.
이은서 eunseo.yi@123factory.de
*본 글은 <비즈한국>의 [유럽스타트업열전]을 편집 및 각색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