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헤어지고 카오락으로 향하는 이별 여행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과 '감정의 지연배달'
“너는 진짜 이기적이야.”
“너도 진짜 이기적이야.”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다다를 때쯤, 그는 나에게 '이기적'이라고 했다. 아니, 굳이 영어로 말하면 ‘mean’하다고 했다. ‘mean’은 못됐다는 의미다. 나는 그 의미를 알았지만, 그냥 '이기적'이라는 단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의 감정과 내 뇌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단어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 그것도 조울증의 특성일 것이다.
“내가 이기적이면 너를 이 방콕의 교통체증에서 아무 데나 내려주지,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니?” 그는 반문했다.
그래,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이게 연인 사이의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그리고 왜 갑자기 다 헤어져놓고 10시간 동안 차에서 아무 말도 없다가 공항 다 와서 이 난리일까. 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젠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도 사람이니까.
그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도, 그 의미를 알 수도 없었다. 보통의 나라면 엄청나게 분노하고, 나를 변명하고 화를 내야 하는데, 왜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을까. 빨리 무시하고 공항으로 가는 게 내 목표였기 때문일까. 그를 화내지 않게 하고 내 계획을 이루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내 마음과 내 감정이 어떻든 말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과 '감정의 지연배달' 감정은 조울증 환자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오직 계획이나 목표가 제일 중요해져 버리고, 자신의 감정은 완전히 무시된 채로. 그와의 만남과 이별은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도시, 방콕
방콕은 내가 사랑하는 도시였다. 그를 만나기 전에 겨우 3박 5일로 방문한 것이 전부였지만, 찌는 듯한 더위, 잘못된 호텔 예약으로 돈을 많이 날린 것, 6시간 비행의 고단함, 수영도 못하고 계획대로 되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너무 행복했던 여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미련이 남은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기에 또 가고 싶은 곳. 누군가와 같이 말고 그냥 혼자 자유롭게 가고 싶었던 곳.
다시 가면 완벽하게 혼자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곳. 담당의는 나의 강박과 답답함에 이렇게 대답했다.
"완벽한 여행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그냥 일반인의 불만족 정도가 아니다. 아주 후회되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처럼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 지금은 조울증을 인정했으니 완벽한 여행은 없다고 생각한다. 계획을 다 마치지 않아도 좋은 여행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젠 알아가고 있다.
나고야에서 만난 그의 직장은 방콕에 있었다. 그것 역시 내가 그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미결의 여행을 완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는 나고야에서 헤어진 후 거의 3주 만에 방콕에서 재회했다. 그는 나를 위해 푸켓 근처 카오락이라는 곳에 리조트를 예약했다고 했다. 카오락은 알고 보니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방콕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의 차로 카오락까지 10시간을 운전해서 가는 낭만적이면서도 힘들 것 같은 로드 트립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실 그를 다시 만나러 방콕에 가기 전까지 여전히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가 사실은 인신매매단이라면?(그렇기엔 그는 명함도 있었고 회사 공식 인스타, 링크드인에 얼굴이 올라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증거가 있음에도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도 그를 보러 갔다.
내 조울증은 증거가 있었음에도 그저 극도의 불신과 망상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면서도 충동으로 그를 그저 믿기로 결심했을 뿐이었다.
그는 다행히 인신매매단이 아니었고 방콕 여행에서 나는 처음 여행 때 피곤해서 가지 못했던 루프탑 바도 가고 카오산로드도 방문했다. 그와 클럽에서 재미있는 시간도 보냈다. 내 방콕에서의 추억은 완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날 헤어졌다. 우리는 호텔 조식을 따로 먹었다. 나는 조식을 먹고 오면 그가 카오락으로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카오락으로 항상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내가 일부러 조식을 늦게 먹었음에도 호텔방에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카오락으로 갈 거라고 했다. 카오락에 있는 친구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나도 카오락에 가고 싶었다. 이미 그가 보내준 리조트 정보도 다 검색했고 카오락이 어떤 곳인지도 다 알아봤으니까. 그건 이 여행의 또 다른 목표였다.
“나도 같이 카오락을 가도 돼?”
그는 그래도 된다고 했다. 정말 외국인들은 쿨하구나. 아니, 내가 쿨한 건가?
나는 그저 조울증 환자 그 자체였다. 카오락에 가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자존심도, 감정도 모두 무시한 채, 오직 그곳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결심만으로 꽉 차 있었다. 어쩌면 외국인인 그와의 관계와 이별이 현실이 아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영화의 대본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카오락으로 가는 것이 곧 내게 주어진 스크립트라고 믿었다.
나는 카오락이라는 퀘스트를 완수해야만 했다. 울고 싶어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어느 순간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재밌기만 했다. 여행과 이별이라는 이름의 쾌락에 지배당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울증은 이렇게 고통마저도 본인을 속여낸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살며시 찾아와서 그 고통을 일깨우고 끝없는 지옥으로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