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위한다는 말의 위험성: 트럼프와 윤석열을 향한 니묄러의 경고
처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끌고 갈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체포할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유대인들이 표적이 되었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일이 나와 관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왔을 때,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줄 사람은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니묄러가 남긴 그 유명한 말이다. 나치 시기의 침묵과 방관을 고백한 문장이다. 니묄러는 처음엔 히틀러를 지지했던 루터교 신부였지만, 나치의 폭력을 체험하고 수용소에 갇힌 뒤 “중립과 침묵은 공범이 된다”는 깨달음을 이 고백으로 남겼다.
마르틴 니묄러의 고백은 흔히 과거의 참회처럼 읽히지만, 그 본질은 현재를 향한 경고에 가깝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히틀러라는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권력이 예외를 만들 때 이를 ‘아직은 내 일이 아니다’라며 방관했던 사회의 태도였다.
“처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끌고 갈 때, 나는 침묵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자’라는 대상이 아니다. 핵심은 사회가 가장 안도하는 순간, 아직 질서 안에 있다고 믿는 그 시점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취약해진다.
지금의 미국은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트럼프가 주도해온 정치 방식은 단순한 정책 논쟁이나 이념 대립을 넘어, 권력을 비판하는 집단과 제도를 지속적으로 타자화하고 법의 신뢰를 잠식하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을 앞세운 반이민 정책은 그 상징적인 사례다.
이민자는 범죄자와 동일시되고, 국경 통제는 ‘국가 정체성’과 ‘안보’의 문제로 격상된다. 그 과정에서 행정 권력의 재량은 비대해지고, 영장 없는 체포나 장기 구금, 가족 분리 같은 조치는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된다. 다수의 시민은 말한다. “나는 시민이다.” “나는 합법이다.”
니묄러가 침묵을 선택했던 바로 그 논리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태도와 언어다. 트럼프는 언론을 ‘국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사법부의 판단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며, 선거 결과조차 자신의 정당성에 부합할 때만 존중해 왔다. 법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범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하면 무시해도 되는 장애물처럼 다뤄진다.
이 과정에서 폭력은 점점 정상화된다. 최근 ICE 단속과 관련된 시위 현장에서 비무장 시민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요원들이 얼굴과 신분을 가린 채 작전에 나서며 과잉 진압을 벌이는 장면은 미국 사회에 깊은 불안을 남겼다. 그럼에도 이러한 행위는 ‘애국’, ‘법과 질서’,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언어로 합리화된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곧 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치환된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반박한다. “미국은 나치 독일이 아니다.” 그 말은 사실이다. 제도도, 역사도, 결과도 다르다. 그러나 니묄러가 경고한 것은 결과의 동일성이 아니라 과정의 반복이었다.
히틀러 역시 처음부터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공포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했으며, 예외적 조치를 반복해 법을 잠식했다.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유대인 — 그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너무 늦게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정치가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를 한 번에 무너뜨리기보다, 조금씩 신뢰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은 신뢰할 수 없다고 몰아붙이고, 자신의 정책에 제동을 거는 법원은 편향되었다고 낙인찍으며,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비국민적 존재로 규정하는 언어가 반복될수록 시민들은 점점 피로해진다. 그리고 그 피로 속에서 침묵은 어느새 중립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니묄러는 분명히 말한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고. 그것은 권력이 다음 선을 넘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는 선택이라고.
이 지점에서 한국의 경험은 중요한 대비를 제공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을 대국민 발표하며 비상 권한을 행사하려 했던 순간, 한국 사회는 그 시도를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넘기지 않았다. 국회와 정치권은 즉각 대응했고, 시민사회와 언론 역시 빠르게 반응했다. 계엄이라는 극단적 권력 행사는 곧바로 제동이 걸렸다.
이 사례의 의미는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한국 사회는 “설마 여기까지 가겠는가”라는 안일함 대신, 지금 이 순간이 선을 넘는 지점일 수 있다는 감각을 공유했다. 니묄러가 뒤늦게 깨달았던 교훈이, 이번에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작동한 것이다.
물론 한국의 민주주의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분명히 보여준다. 권위주의는 선언이 아니라 ‘시도’의 단계에서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곧바로 나치 독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는 태도야말로 민주주의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신호라는 점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합법의 외피를 두르고 무너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늘 나중에야 깨닫는다.
니묄러의 말은 과거를 비난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향한 질문이다.
"지금 누군가의 권리가 예외로 취급되고 있을 때, 우리는 침묵하고 있는가, 아니면 선을 긋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