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교과서, 동화 4부. 21세기 동화는 K드라마로

왕자 대신 CEO, 공주 대신 계약직

by 슈퍼T

21세기 동화는 K드라마로 돌아왔다

— 착해야 살아남는 여자, 감정을 억누르는 남자, 그리고 여전히 구원은 사랑뿐인가?


한때 우리는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하던 동화 속에서 배웠습니다. 착한 아이는 복을 받고, 참는 이는 사랑을 얻으며, 희생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어린 시절, 그 이야기들은 우리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삶의 도리처럼 여겨졌습니다. ‘착해야 한다’, ‘참아야 한다’, ‘희생해야 한다’는 교훈은 우리 내면에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자라난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장르 속에서 어느 날 문득 그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로맨스 드라마입니다. 화려한 영상미와 현대적인 감각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서사는 사실상 오래된 동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 구해줄 거야.”, “끝까지 참고 견디면 사랑이 찾아와.”, “희생은 언젠가 반드시 보답받아.”

이 문장들은 더 이상 오래된 동화책 속의 문장이 아니라, 2020년대 한국의 인기 드라마들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 사랑의 불시착, 시크릿 가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작품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시청자들은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사랑 이야기를 보지만, 그 안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착함’을 미덕으로, ‘참음’을 덕목으로, ‘희생’을 필수적인 삶의 태도로 묘사합니다.

21세기의 K드라마는 마치 고전 동화의 현대적 변주곡처럼, 순종하는 여성상과 감정을 억누르는 남성상을 그립니다. 착해야만 살아남는 여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는 남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말에는 여전히 ‘사랑’이라는 구원이 자리합니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희생, 인내가 미화되며 그럴 듯한 희망으로 포장됩니다. 이처럼, 시대가 변해도 문화 속 여성과 남성의 역할 모델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21세기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착함’과 ‘참음’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사랑’을 약속합니다. 마치 동화책 속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여전히 착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왜 감정을 억누르는 남성이 이상적 인간상으로 남아 있을까요? 그리고 그 구원이 정말 ‘사랑’이어야만 할까요?


‘순종의 동화’는 어디로 갔는가? → 안방극장으로

디즈니가 ‘착한 공주’를 대량 생산해 냈다면, 한국 드라마는 ‘희생하는 여자’와 ‘말없이 감내하는 남자’를 매년 양산하고 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언제나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헌신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남자 주인공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하지만, 결국에는 구원자처럼 등장합니다. 모든 갈등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자연스럽게 마무리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걸까요? 그리고 이 반복되는 서사 속에서 어떤 감정은 억눌리고, 어떤 욕망은 길들여지고 있을까요?

동화는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때 동화는 아이들의 꿈이었고, 왕자와 공주, 마법과 기적, 그리고 결국 찾아오는 행복한 결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동화는 더 이상 책 속에 머무르지 않고, TV 속 로맨스 드라마, OTT 시리즈, 유튜브 웹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 속 ‘사랑 이야기’로 부활했습니다. 바뀐 것은 배경과 직업뿐입니다. 왕자님은 이제 재벌 2세나 완벽한 CEO가 되었고, 공주는 아르바이트생, 계약직, 혹은 눈치 보며 버티는 사회 초년생으로 변했습니다.

이 변화는 단지 배경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과거 유럽 동화가 왕정과 귀족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상적 인간형’을 길들이는 도구였다면, 오늘날 한국의 로맨스 드라마는 자본과 사회 규범이 원하는 인간상을 반복 재생산하는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착한 여자’는 늘 참고 기다리며 상처받아도 미소 짓는 존재로, ‘상처 입은 남자’는 감정 표현은 서툴지만 결국 여자를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말은 언제나 사랑, 결혼,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행복한 복귀’입니다. 이 서사에는 그림 형제와 디즈니를 거쳐 정제된 동화 구조가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살아 있습니다. 희생과 인내, 구원과 보상이라는 동화의 핵심 테마가 이제는 드라마의 클리셰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드라마로 옮겨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매일 스크린을 통해 여전히 ‘착함’을 칭찬하고, 눈물을 보상하며, 감정 억제를 ‘사랑’이라 착각하는 이야기를 소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해야 할 때입니다. 이 ‘착함’은 진짜 미덕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조용히 통제하기 위한, 아주 부드러운 훈육의 도구일까요?

이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21세기 동화가 감추고 있는 이면을 조금씩 벗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짜 인간의 다양성과 욕망, 상처와 성장의 이야기를 다시 찾는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드라마는 왜 자꾸 ‘착한 여자’를 반복할까?

한국 드라마 속에서 반복되는 ‘착한 여자’ 서사는 단순한 우연이나 제작상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는 오랜 사회적, 문화적 배경 위에 세워진 통제 서사이며, 오늘날까지도 깊이 작용하는 가치관과 규범을 반영합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

표면적으로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속합니다. 밝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과 사랑을 그리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고전 동화의 전형적인 서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주인공 김미소는 상사의 말과 행동을 언제나 충실히 따르는 ‘이상적인 비서’이자 ‘착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을 우선하며, 어떠한 어려움과 불편함에도 참고 인내하며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모습은 ‘좋은 여자란 조용히 참고 이해하는 존재’라는 한국 사회 내 오래된 여성상과 완벽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반면 이영준은 감정 표현에 서툴고 트라우마와 결핍을 지닌 ‘상처 입은 왕자’입니다. 그는 때로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치유의 힘으로 변화하며 주인공과 함께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이 서사는 전형적인 디즈니 동화의 구성을 답습합니다. 즉, ‘착한 공주가 상처 입은 왕자를 구원하고,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동화 속에서 보았던 왕자와 공주의 관계가 현대 한국 드라마로 재탄생한 셈입니다.

이 같은 서사의 반복은 단순히 이야기의 틀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깊은 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가부장적 전통과 ‘여성의 헌신’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입니다. ‘좋은 여자’란 본인의 감정보다는 가족과 주변을 위해 희생하고, 조용히 참는 존재로 규정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미디어 속 여성상으로 재현되고 강화됩니다. 드라마 속 ‘착한 여자’는 단순히 개인의 성품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성상으로서, ‘참고 견디면 결국 사랑과 안정이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합니다.

이 같은 ‘착한 여자’ 서사는 사회적 통제의 역할을 합니다. 여성 시청자에게는 ‘착하고 희생하는 여성’이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각인되고, 그러한 태도를 강요받게 됩니다. 동시에 남성 시청자에게는 ‘상처 입었지만 구원받는 남성’이라는 이상형이 제시되어, 감정 표현의 억압과 책임 회피가 미화됩니다. 이 구조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복잡한 감정과 욕망, 갈등을 억누르고 사회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순응적 서사로 작동합니다. ‘희생과 인내는 결국 보상받는다’는 이야기는 실제 현실의 불평등과 차별을 가려주는 마스크가 됩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비롯한 많은 한국 로맨스 드라마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사회적, 문화적 규범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장치입니다. 이들이 반복하는 ‘착한 여자’와 ‘상처 입은 남자’의 서사는 과거 동화에서 비롯된 ‘순종과 구원’의 서사를 오늘날에도 지속시키며, 여전히 바뀌지 않은 사회적 통제와 기대를 반영합니다. 우리는 이런 서사가 왜 계속 소비되고, 또 왜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틀을 넘어서 새로운 인간상과 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불시착: 이념의 장벽 속에서도 ‘남자 구원서사’는 여전히 건재하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한국과 북한이라는 극명하게 다른 이념적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서사를 선보였습니다. 윤세리는 성공한 재벌 2세로 삶을 영위하다 우연히 북한 땅에 떨어지면서, 곧바로 ‘구조의 대상’이 됩니다. 그녀는 낯선 공간에서 연약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반면 리정혁은 북한 장교라는 강력한 신분과 권위를 지녔지만, 동시에 내면에 깊은 상처와 슬픔을 지닌 ‘고전적 왕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언제나 윤세리를 보호하며 희생하고, 그녀의 구원자가 되어줍니다. 이 드라마는 이념과 체제의 장벽을 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내세우지만, 사실상 그 안의 인물 역할 구도는 과거 동화의 전형적인 ‘남자 구원서사’를 반복합니다. 여성은 보호받는 대상이고, 남성은 희생하며 구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입니다.

‘사랑의 불시착’이 다루는 분단과 이념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갈등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복잡한 현실은 드라마 속에서 단순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되고 마무리됩니다. 즉, 깊고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는 이야기에서 지워지고, 이질적인 두 세계는 ‘사랑’이라는 단일한 감정으로 포장됩니다. 이는 결국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고, 관객이 편안하게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든 ‘현실 회피형 판타지’의 확장에 불과합니다.

이 드라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대중문화 속 ‘남자 구원서사’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상처 입고 고통받는 남자가 여성을 구원하고 사랑으로 치유받는 서사는, 과거 동화에서부터 현재 로맨스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남성에게 ‘구원의 책임’을 부여하며, 동시에 여성에게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역할을 고착화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젠더 관계와 개인의 정체성에 복잡한 영향을 끼치며, 때로는 불균형한 기대와 역할 분담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사랑의 불시착’은 분단과 이념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대중적 욕망을 담아내지만, 그 안의 서사 구조는 과거의 ‘남자 구원서사’를 답습하며 현실 문제를 단순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통제된 서사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보다 다양하고 현실적인 인간상과 관계상을 탐구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구원은, 한쪽의 희생과 구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서로가 함께 성장하는 과정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독특한 능력, 그러나 결국엔 ‘감정을 배우는 착한 여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천재 변호사 우영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영우는 뛰어난 기억력과 분석 능력으로 법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지만, 사회적 관계와 감정 표현에서는 서툰 모습을 보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서사는 우영우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인정받는 과정보다는, 점차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부응해 가며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익히고 적응해 나가는 성장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특히 로맨스 서사는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남성 캐릭터(이준호 분)가 우영우를 다정하고 인내심 있게 받아들이며 보호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결국, 이 관계는 ‘특이한 여성’도 ‘사랑받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기준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이한 여성’이나 ‘다름’에 대한 관용은 제한적입니다. 우영우 같은 캐릭터가 환영받는 이유는 그녀가 독특하되, 사회적 질서와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특이함이나 개성은 허용되지만, 그것이 사회적 규범과 충돌하지 않고, 결국은 ‘통제 가능한 테두리’ 안에서 소비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보수성이 드라마 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영우가 자신의 방식과 개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사회적 순응과 적응을 통해 ‘착한 여자’ 상으로 완성되는 서사 구조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다름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다름’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적 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는 한국 대중문화가 아직도 ‘착함’, ‘순종’, ‘사회적 적응’이라는 틀 안에서 여성상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진정한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하고,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적 서사가 더욱 필요함을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감정 억제 + 헌신 + 착한 사랑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상대방을 위해 ‘말없이 헌신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인 채송화와 민하 같은 경우, 감정 표현에 매우 조심스럽고 소극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고백을 망설이고 기다리며, 상대방을 위해 참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드라마는 이러한 ‘감정 억제’와 ‘조용한 착함’을 가장 숭고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한편으로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말하지 않으며, 자신을 미루는 것일까요?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줘야 진짜 사랑”이라는 고정관념은 사랑과 관계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 감정의 침묵과 희생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때로는 관계에서 ‘참음’과 ‘기다림’이 미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행동과 서사에 깊게 반영되어,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공감과 정서적 연결을 이끌어 냅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현대인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다루면서도, 한국 사회 특유의 ‘감정 억제’와 ‘착한 사랑’이라는 이념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서사를 통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받지만, 동시에 솔직한 소통과 자기 표현의 중요성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은 헌신과 배려뿐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솔직한 대화와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깨비: 감정 억제와 희생적 구원 구조

드라마 '도깨비'는 저주받은 왕자와 선택받은 슬픈 소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김신, 즉 도깨비는 ‘저주받은 왕자’이자 고귀한 남성의 이미지로 그려집니다. 그는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진정한 사랑을 찾아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인물입니다. 반면, 지은탁은 ‘슬픈 운명을 지닌 선택된 소녀’로, 도깨비의 신부로서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을 희생하여 도깨비를 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통 동화에서 “왕자가 저주를 풀기 위해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고전적인 서사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도깨비와 지은탁 모두 자신의 고통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사랑을 위해 묵묵히 기다리고 참으며 결국에는 ‘희생’을 선택합니다. 김신은 지은탁을 위해 자신이 사라지는 운명을 감수하고, 지은탁은 도깨비의 칼을 뽑는 대가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서로를 위한 희생을 완성합니다. 이 구조는 ‘사랑은 자기 파괴적 희생이다’라는 오래된 서사를 반복합니다. “진짜 사랑은 나를 없애는 것이다.”, “운명은 받아들여야 한다.”, “너를 위해 내가 사라질게.”

이 문장들은 아름답고 숭고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개인의 자아를 부정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희생을 이상화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 속에서 동화의 ‘순종적 공주’는 ‘운명에 묶인 슬픈 소녀’로 변모하고, 저주받은 왕자는 ‘고통을 미화하는 고귀한 남자’로 되살아납니다.

'도깨비'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위해 사라지는 것”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이는 개인 욕망과 감정을 억제하는 통제된 상상력의 한 형태입니다. 특히 여성 주인공은 여전히 희생과 순응을 통해서만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감내하는 방식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슬픔과 고통 역시 눈물이나 표현이 아니라 운명에 순응하는 침묵으로 미화되곤 합니다. 희생의 미학은 한국 사회에서 깊게 뿌리내려, 여성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남성은 ‘고귀한 저주’를 견뎌내며, 서로를 위한 희생을 통해 사랑이 완성된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도깨비'는 고통과 희생을 숭고화하며, 감정 억제와 자기 희생의 이상을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착한 동화를 뒤집었지만, 체제를 넘지 못했다

더 글로리, 구르미 그린 달빛, 이태원 클라쓰와 같은 작품들은 전통적인 ‘착한 동화’의 서사를 일정 부분 뒤집거나 반전시키면서, 주인공들이 자기 욕망과 정의를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 드라마에서는 기존의 순종과 희생을 미덕으로 삼던 이야기 구조에서 벗어나, 주인공들이 과거의 굴레를 깨고 적극적으로 문제에 맞서거나 사회적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더 글로리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복수를 계획하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 하고,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는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며, 이태원 클라쓰는 사회적 약자가 자본과 권력에 맞서 새로운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조차 ‘어디까지가 진정한 반항이고, 어디부터가 결국 체제에 순응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 앞에서는 명확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의 반항은 대부분 체제 내부에서 허용되는 선 안에서 이루어지며, 극복하는 대상 역시 기존 사회 질서의 완전한 붕괴가 아닌, 부분적 개혁이나 개인적 성공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이 드라마들은 혁명이나 근본적 변화보다는 기존 체제의 틀 안에서 주인공들이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착한 동화’가 요구하는 보상과 복수를 일정 부분 충족시키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의미의 체제 비판이나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대한 메시지는 희미해지고, 기존 질서에 대한 묵인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작품은 전통적 동화 서사를 뒤집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착함’과 ‘순응’을 반복하는 또 다른 변주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더 글로리: 주체적 여성 + 복수의 감정 + 정의 실현의 서사

'더 글로리'의 문동은(송혜교)은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치밀하고 정교한 계획을 실행하는 인물입니다. 이 드라마는 기존에 흔히 등장하던 ‘희생하는 착한 여자’의 이미지를 벗어나, 능동적으로 복수를 기획하고 주도하는 주체적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세웠습니다. 이처럼 문동은은 분노와 복수라는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며,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존 동화나 드라마에서 ‘순종’과 ‘희생’에 머물던 여성상과는 분명한 차별점이자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동은의 분노와 복수는 철저히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합니다. 즉, 그녀가 사회 정의의 대리인이 되어야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 감정에 기반한, 혹은 ‘비윤리적’으로 비칠 수 있는 분노의 해소는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드라마는 복수를 완전한 승리로 끝맺지 않고, 문동은이 결국 자기 희생과 내면의 정화, 치유라는 이미지로 마무리되는 구조를 취합니다. 이는 복수의 ‘착한’ 면모만을 허용하며, 분노의 원초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폭발을 제한하는 사회적 통제 장치로 작용합니다. 결국 이 서사는 ‘착한 복수’만이 가능한 이야기이며, 분노조차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만 정제되고 소비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21세기 여성 주인공의 분노가 어떻게 통제되고 제도화되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 성 역할 전복 + 주체적 여성 + 조선시대의 사랑

'구르미 그린 달빛'의 홍라온(김유정)은 남장을 하고 궁중에 들어가면서 고정된 성 역할을 흔드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이는 조선시대라는 엄격한 성 역할과 권력 구조 안에서 자유를 꿈꾸는 인물로 보이며, 한때 페미니즘적 가능성을 내포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정치적 전복이나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로맨스 서사를 위한 장치로 소비됩니다. 즉, 남장을 통해 자유롭게 궁중 생활을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남자 주인공인 세자의 보호 아래 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홍라온의 남장과 성 역할 전복은 일시적인 변화에 불과하며, 결국 기존의 권력 구조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권력을 쥔 이는 여전히 남성이며, 여주인공은 그 권력 안에서 ‘이해받고 선택받는 존재’로 남게 됩니다. 이처럼 성 역할의 교란은 표면적인 요소일 뿐, 실제 서사는 전통적인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 즉 기존 동화 서사로 다시 회귀합니다. 결과적으로 '구르미 그린 달빛'은 자유와 주체성을 말하지만, 그 실체는 ‘안전한 로맨스’ 틀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데 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 클라쓰: 계급 반란 + 젠더 다양성 + 청년 성공기

박새로이(박서준)는 기득권과 거대 자본에 맞서 싸우는 인물로, ‘계급 반란’의 상징처럼 그려집니다. 이 드라마는 차별과 혐오, 패거리 문화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다문화 가정,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캐릭터를 등장시켜 포용과 다양성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로 인해 '이태원 클라쓰'는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은 새로운 사회상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최종 목표는 결국 ‘기업의 성공’과 ‘복수의 완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승리이며, 자본주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 한계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태원 클라쓰'가 그리는 공동체는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나 불평등 해소보다는 ‘윤리적 자본가’ 모델을 이상향으로 제시합니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착한’ 기업가가 성공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셈입니다. 실제로는 재벌 권력,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 등 근본적인 문제들은 건드리지 않고,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한 승리로 모든 갈등과 모순이 봉합됩니다. 이는 ‘착한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변화보다는 현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습니다.


공통적 한계: 시스템 바깥의 상상은 없다

이들 드라마는 전통적인 동화 서사를 일부 전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착함, 침묵, 희생에 대한 메시지를 의심하며, 일견 “상상력의 반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과거와 달리 주체적이고 강한 인물로 그려지며, 기존의 순종과 희생의 틀을 흔드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반란이 오직 “체제 내부에서만 허용된 반항”이라는 점입니다. 드라마 속 복수는 사회 정의라는 틀 안에서만 정당화되고, 여성은 주체적으로 보이나 결국 ‘사랑받는 존재’라는 제한된 역할에 머무릅니다. 혁명과 반란은 결국 자본주의와 권력 시스템과 타협하며 마무리됩니다. 즉, 이들 작품은 전통적 동화 구조를 부수는 듯 보이지만, 그 바깥의 완전히 새로운 서사나 상상력의 영역을 활짝 열지는 못합니다. 상상력은 여전히 감시받고 있으며, 검열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이 느끼는 분노와 복수심은 결국 치유와 용서의 방향으로 수렴됩니다. '이태원 클라쓰'의 반란과 성공은 결국 ‘회사를 통한 승리’로 끝나고, 『구르미 그린 달빛』의 자유 역시 남성 주인공의 보호와 사랑 안에서만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형 동화의 본질적 구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착함과 순응, 기존 체제의 규범을 전제로 통과되는 ‘검열된 상상력’일 뿐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상상력은 이 한계를 넘어서야 하며,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변화를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서사는 계속 반복되는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드라마와 이야기 속에는 왜 여전히 ‘착한 여자’가 중심에 서는 걸까요? 왜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걸까요? 이는 단순한 우연이나 시대적 유행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질문의 답은 우리 사회의 깊은 뿌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유교적 가부장제와 산업화 시기의 자기희생 윤리를 내면화해 왔습니다. ‘참고 견디면 복이 온다’는 동화 속 메시지는 산업화 시대가 되면서 ‘버티고 일하면 성공한다’는 삶의 도덕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드라마는 다시금 ‘착한 여자가 결국 사랑받는다’는 이야기로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 서사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남성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서로의 상처를 숨기고 치유해 나갑니다.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마음 깊숙이 여전히 살아 숨 쉽니다. 그 이유는 ‘고통과 희생이 미덕이다’라는 오래된 믿음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착한 주인공’만을 사랑하는 걸까요? 여기에 심리적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사람들을 ‘착한 여자’, ‘상처 많은 남자’, ‘기적 같은 재회’ 같은 환상적인 서사에 끌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상품화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정교한 서사 장치입니다. 감정은 콘텐츠가 되고, 그 콘텐츠는 또다시 소비를 촉진하는 경제적 시스템 속에서 생산되고 소모됩니다.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적 배경도 이 환상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첫째, 유교적 가족주의 전통은 ‘어른 공경과 효도, 인내’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둘째, 학교부터 회사, 가정까지 이어지는 위계적 질서에서는 ‘참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가치가 일상적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셋째, 여성에게는 ‘배려하고 인내하며 헌신하는 존재’라는 역할이 여전히 강력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성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무뚝뚝한 남자’가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이 같은 서사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부드러운 통제 방식이기도 합니다. 여성은 감정을 억제하고, 남성은 침묵으로 책임지는 역할 분담은 결국 모두가 기존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질서 유지의 부드러운 도구’입니다. 옛날 동화가 권력과 사회 규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던 것과 그 본질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참는 자’만이 보상받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까요? 여기서 ‘착함’은 단순히 도덕적 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권력에 순응하는 태도, 즉 불의에 침묵하고 불평등을 견디며 희생을 미화하는 사회적 태도를 뜻합니다. 오늘날 많은 로맨스 드라마들이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가만히 있어라. 언젠가는 구원이 올 것이다.” 이 메시지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 우리는 ‘참는 자’만이 보상받는 세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분명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참는 자’만이 보상받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단지 드라마 속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들여다보고 바꿔 나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드라마 속 동화, 현실에 미치는 문제

우리가 매일같이 보는 드라마 속 이야기는 단순한 판타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서사 구조는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양식을 고착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먼저 여성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를 살펴보면, ‘참아야 사랑받는다’는 고정관념이 반복적으로 심어집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흔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고통을 감내하며, 끝내 헌신을 통해 사랑을 쟁취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에서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착함’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이게 만듭니다.

반면 남성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강해져야 한다’는 왜곡된 역할 모델이 강제로 주어집니다. 무뚝뚝하지만 책임지는 남자, 속으로는 상처받았지만 겉으로는 절제하며 보호자로 서야 한다는 규범입니다. 이런 강요는 남성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어, 내면의 고립과 소외를 낳기도 합니다.

이처럼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형태는 서로 평등하게 소통하는 건강한 인간관계라기보다, 상처를 치유하고 희생을 거래하는 일방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서로의 진짜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해를 키우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사회가 정한 규범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문화를 반복 재생산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닙니다. ‘감정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종의 문화적 검열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순종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현대판 동화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동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만 바뀌어 안방극장과 화면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숨겨진 힘을 직시하고, 진정한 감정의 자유와 평등한 관계를 향한 새로운 상상력을 키워 나가야 할 때입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가 매일 접하는 드라마는 사실상 21세기의 동화입니다. 시대와 장르가 달라도 그 안에는 늘 ‘희생하는 여자’와 ‘상처 입은 남자’가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익숙한 구조가 숨어 있습니다. 이 구조는 우리가 어릴 적 듣던 동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참으면 언젠가 사랑이 올 거야.”, “말없이 견디면 보상받을 거야.”, “희생은 미덕이야.” 이런 메시지들은 개인의 진짜 감정과 욕망을 ‘순응’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르고, 사회가 허용하는 상상력의 경계를 좁히며 보이지 않는 통제 장치로 작동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이런 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처럼 다양한 삶과 감정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류 로맨스 드라마들은 여전히 ‘착한 여자’와 ‘무심한 남자’라는 구원 서사를 반복하며 그 틀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왜 사랑은 늘 눈물과 헌신으로만 표현되어야 할까요? 왜 감정을 참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라는 믿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여전히 그런 이야기에 끌릴까요?

동화의 유령은 여전히 안방극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동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뀌어 ‘드라마’라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공장처럼 찍힌 착한 인간’을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로맨스 드라마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종의 교과서’, ‘감정의 매뉴얼’, 그리고 ‘여성성과 남성성의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드라마들은 21세기형 동화이며, 이렇게 속삭입니다. “참아야 예쁘다.”, “남자가 지켜야 한다.”, “결혼이 해피엔딩이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다만 주체를 바꿔야 합니다. 21세기 동화는 더 이상 책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넷플릭스와 TV 드라마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를 위해 쓰인 것일까요? ‘착함’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통제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언제쯤 스스로 주체적인 욕망을 가진 공주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왕자를 만나게 될까요?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할 때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들려줄 새로운 동화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삶의 방식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슬픔도, 분노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하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다양한 삶과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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