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모두에게, "여인의 향기"

눈먼 퇴역 장교와 소년이 서로를 위로하는 여정

내 인생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바로 알 파치노(Al Pacino) 주연의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1992)>다. 수많은 영화 중 이 작품을 인생작으로 꼽는 이유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인생의 기로에서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와의 만남은 우연한 '낚임'에서 시작됐다. 예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본 탱고 신(Scene)때문이다. 알 파치노와 함께 춤을 추던 여인(도나)이 너무나 아름다워 영화를 찾아보게 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 감동은 '미끼에 낚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잘 만든 영화의 영향력은 굉장해서, 그 이후 내 최애 술은 잭 다니엘스(Jack Daniel's)가 되었고 드림카는 페라리(Ferrari)가 되었다.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1992)>

시청 플랫폼: 넷플릭스

러닝타임: 2시간 36분


※ 아래 내용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재밌게 봤습니다. 작품이 가진 묘한 여운을 온전히 느끼신 후에 제 글을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시청 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베어드 고등학교의 전통과 명예를 상징하는 부조


지켜야 할 전통과 명예란 무엇인가


영화는 시작부터 1870년대 졸업생들의 기념 부조와 명판을 보여주며 베어드 고등학교의 오랜 전통과 명예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위선이 가득하다.


고등학생임에도 벌써 선민의식에 젖어 고(苦)학생인 찰리를 조롱하며 "영주가 빈민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풍습."이라 조롱하는 해리. 그리고 그 말을 듣고 해리를 향해 웃으며 "더러운 위선자군."이라 말하는 조지.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 의식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자부심을 가지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교장이 아부로 얻은 신형 재규어 차를 보며 그 위선을 비웃기 위해 테러를 저질렀지만, 정작 자신들이 위기에 처하자 본인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비겁한 위선자'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반면 찰리는 성탄절 차비를 벌기 위해 추수감사절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고단한 처지임에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침묵을 택한다. 이 대비 효과는 나중에 상벌 위원회에서 누가 진정한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어두운 공간에 빛줄기가 잭 대니얼스와 은색 ID 팔찌를 비춘다


상처입은 용사의 가시 돋친 '후-아!'


찰리가 아르바이트를 위해 찾아간 집의 별채에는 프랭크 중령이 어두운 공간에 홀로 앉아 있다. 그는 첫만남부터 압박 면접보다 강한 독설로 찰리를 몰아세운다.


프랭크가 습관처럼 내뱉는 "후-아!(Hoo-ah!)"는 단순한 추임새가 아니다. 이는 미 육군에서 쓰이는 H.U.A(Heard, Understood, Acknowledged), 즉 "알았고, 이해했으며, 확인했다."는 뜻의 군사 구호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는 이 외침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상황을 통제하고 있으며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음을 선포한다.


손목에 찬 은색 ID 팔찌 역시 그가 놓지 못한 명예의 끈이다. 하지만 그의 강인함은 추수감사절, 형 윌리의 집에서 조카 랜디의 입을 통해 무참히 깨진다. 사실 그는 2번의 진급 누락 후 베닝 요새로 좌천되었고, 술에 취해 수류탄으로 묘기를 부리다 시력을 잃은 '부서진 영웅'일 뿐이었다. 그는 이번 뉴욕 여행을 인생의 마지막 여정으로 삼으려한다. 그리고 이 여정의 도구로만 보았던 찰리로 인해 그는 삶의 길을 다시 잡는다. 퇴로 없는 노병의 "후-아!"는 처음엔 방어기제였으나, 나중엔 삶을 향한 생생한 찬가로 변모한다.



지독스러운 공허함과 고독에 터져나오는 울분


죽고 싶은 이유와 살고 싶은 이유


프랭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빛나던 영광의 시절은 뒤로한 채, 지금은 허름한 별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에게는 '존'이라 칭하는 독한 술인 잭 다니엘스만이 함께할 뿐이다. 눈을 잃은 이유도, 이런 여생을 사는 이유도 결국 본인에게 있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세상 모든 것과 맞서 왔지만, 남은 것은 '고독'뿐이다.


뉴욕의 마지막 여정에서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때 그를 막아선 것은 찰리의 순수한 양심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대라"는 프랭크의 절규에 찰리는 "탱고와 페라리"를 언급한다. 사실 그것이 정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프랭크는 자신을 지키려 목숨까지 거는 이 청년의 고귀한 영혼에 감응하며 결국 총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프랭크는 지미 듀란트의 노래 가사를 나지막이 읊조린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그런 마음 없으셨나요. 그러나 아직 머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시겠죠. (Did you ever have the feelin' that you wanted to go, and still had the feelin' that you wanted to stay.) 이는 프랭크가 내뱉은 가장 솔직한 생의 고백이었다.



장님이 되고 몰게 된 페라리
그 후 찾아온 공허함과 자포자기 심정


탱고(Tango)와 페라리(Ferrari)


이 두 장면은 명장면인 동시에 프랭크를 절망과 환희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랭크는 오크룸에서 만난 도나에게 탱고를 제안하며 이렇게 말한다. "탱고에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는 다르죠. 스텝이 꼬이면 그게 바로 탱고입니다."


이는 도나를 용기있게 이끌려는 말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프랭크의 비극적인 인생관을 드러낸다. 그에게 인생이란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 '완전무결함'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눈먼 지금의 자신을 '나쁘다 못해 썩어버린 존재'로 규정하며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찰리는 그에게 인생 역시 탱고와 같음을 일깨워준다.


페라리 시승 장면은 어떤가? 영광의 순간에도 타보지 못한 차를 장님이 되어서야 운전하게 된 그는, 찰리의 눈을 빌려 코너 돌기에 성공한다. 경찰의 제지로 현실로 돌아온 그는, 지독한 공허함에 삶의 의지를 잃지만 찰리가 다시 페라리를 언급하는 순간 깨닫는다. 혼자서는 살기 힘든 이 여정도, 찰리(가족)와 함께라면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확신에 찬 그의 모습은 뉴욕의 여정에서 보인 찰리의 행동으로 굳건하다


여인의 향기 -> 영혼의 향기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상벌 위원회 연설에서 프랭크는 말한다.


"조지는 아버지 주머니 속에 숨었지만, 찰리는 위기와 맞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사기 위해 영혼을 팔지 않았습니다."


프랭크는 찰리를 통해 자신이 버렸던 과거의 순수함을 발견하고, 그를 지켜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프랭크가 여인들의 향기를 맡으며 그 존재를 파악하듯, 우리 역시 사람의 심성을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물질적인 것에서 눈을 감았을 때,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와 영혼의 향기가 더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찰리가 보여준 '진정성(Integrity)'의 가치는 하버드 입학 증서보다 훨씬 더 짙은 향기를 남긴다.


어른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언급하지만, 프랜신은 해야할 일을 알려준다
보호해야 할 존재이자 순수한 영혼


프랜신: 순수함이 건네는 사랑


긴 여정을 마치고 프랭크는 다시 조카 로시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를 가장 먼저 반기는 이는 조카딸인 프랜신이다. 찰리와의 첫 만남에서 프랭크가 고압적인 자세로 무게를 잡을 때, 프랜신은 창문을 두드리며 혀를 내밀고 장난을 쳤다. 당시 프랭크는 그것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흠결이라 느꼈는지, 물건을 던지며 험담을 퍼붇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집에서 마주한 프랜신의 모습은 여전히 맑다. 로시 부인이 떠나기 전, 술을 덜 마시게 하라는 이야기를 할 때, 프랜신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프랭크의 산책을 일깨워준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독설을 내뱉던 어른일지라도, 아이의 순수함은 그 이면의 고독을 꿰뚫어 보고 조건 없는 관심과 사랑을 준다. 프랭크의 곁에는 이제 그의 영혼을 지켜준 찰리뿐만 아니라, 그를 있는 그대로 걱정하고 기다려준 로시 가족이 함께한다.



맺으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순수함을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노련함과 순수함이 반대의 뜻으로 느껴지듯이.

하지만 찰리처럼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프랭크처럼 그 양심의 고귀한 가치를 알아보고 지지하고 포용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생의 방향성이 아닐까.


프랭크는 영화 속에서 여인의 향기만으로 그녀의 성격과 삶을 맞춘다. 우리 인생에도 각자의 향기(색)가 있다.

나의 향기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찰리처럼 올곧고 프랭크처럼 뜨거운 향기를 지닌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후-아!"




커버 사진 출처 : TMDB(The Movie Database) <여인의 향기>,
본문 사진 출처 : 직접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