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공존'의 의미를 생각해보다
시청 플랫폼: 넷플릭스
러닝타임: 1시간 34분
전 소인족 소녀 아리에티예요. 우린 마루 밑에서 몰래 인간의 물건을 ‘빌려’ 살아가죠. 우리에겐 철칙이 있는데, 사람에게 들키면 그 집을 떠나야 해요. 근데 아빠와 설탕을 구하러 갔던 밤, 인간 소년 쇼가 제 모습을 보고 말았어요! - 넷플릭스 소개글
저는 이 영화를 재밌게 봤습니다. 작품이 가진 묘한 여운을 온전히 느끼신 후에 제 글을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시청 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심장이 아픈 소년 쇼는 수술을 받기 전,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요양하기 위해 어머니가 살던 낡은 집을 찾는다. 그곳에는 작지만 당찬 소녀 아리에티가 살고 있다.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이들의 짧은 만남을 통해 소유와 자유, 그리고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잘 만든 영화는 의미없는 요소가 없다. 초반의 주차 문제도 그렇다.
영화 초반, 쇼의 할머니가 차를 끌고 올 때 그녀는 집 바로 앞에 차를 세운다. 하루 아줌마의 차가 입구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그곳에 주차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엿보인다.
이러한 성정은 그녀가 소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는 아리에티의 엄마를 잡았을 때 죄책감보다는 즐거움을 느낀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호기심과 소유욕에 눈이 멀어 곤충이나 물고기를 잡았을 때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녀에게 소인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잘 보관해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수집품'일 뿐이다.
소인족은 인간과 동물의 위협 속에서 생존의 위기를 겪는다. 그들에게 바깥세상을 향한 동경은 사치이며,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는 필수적이다. 현실적으로는 도둑질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들이 이를 '빌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이다.
생각해보면 인간 역시 자연이 주는 선물을 통해 지금의 환경을 일구었으니 '빌린다'는 표현이 꼭 틀리지만은 않다. 소유물이란 결국 인간이 정해놓은 기준일 뿐이다. 소인들은 인간에게 들키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빌리며 셋집살이를 이어가지만, 그들에게 인간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다. 쇼의 외조부가 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특별한 인형의 집까지 제작했지만, 그들이 결국 이를 거절하고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그들은 인간을 두려워만 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둘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택과 감정의 변화에 따라 소인의 삶이 결정되어 버리는 구조 속에서 호의는 때로 독이 된다. 호의에 기대어 편한 삶을 살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 즉 '자유'의 상실이다.
소인족의 개체 수가 줄어든 것은 그들이 인간의 보호를 거부하고 끝내 자유 의지를 선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삶이 옳은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아리에티 가족은 힘든 상황일지라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삶을 택했다. 자신의 운명권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결단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강인한 인간상이다.
쇼는 선의를 가지고 인형의 집, 부엌을 선물하지만 그 행동은 역설적으로 아리에티 가족에게 최대의 위기를 초래한다. 선의로 한 행동일지라도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쇼에게 있다. 그러므로 쇼는 아리에티에게 감사를 받기보다는, 그녀의 평화로운 세계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서로를 향한 존중으로 애틋하게 마무리된다. 쇼는 생존을 위한 실질적인 호의인 '각설탕'을 건넸고, 아리에티는 자신의 상징적인 징표(용기)인 '머리 집게'를 남겼다.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처음엔 위협이었던 고양이가 마지막엔 쇼와 아리에티를 잇는 조력자가 되었듯, 생각과 판단은 유연해야 한다. 타인을 고정된 틀로 판단하지 않을 때 진정한 소통은 시작된다.
글 작성을 마치고,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니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아리에티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공벌레를 무심히 튕긴다. 그때 몸을 둥글게 말고 도망치는 공벌레에게, 아리에티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거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만약 아리에티가 귀여운 소녀가 아니라 우리가 혐오하는 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면, 쇼의 다정함이나 우리의 응원이 이토록 아름답게 성립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결국 '허용 가능한 외형'을 가진 약자만을 선택적으로 동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아리에티가 손에 쥔 가봉용 핀의 용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쥐도 잡을 수 있을 거라 자신하며 무기를 얻었지만, 정작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은 오직 어머니를 구출할 때뿐이었다. 타인을 공격하거나 지배하기 위함이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권으로서만 힘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소인족이 가진 생존의 철학이자 절제된 품격이다.
만약 그녀에게 지켜야 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처럼 인간이 되어 행복해지는 마법 같은 결말이었다며 어땠을까? 수많은 가정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결국 아리에티는 가족이라는 족쇄이자 보루를 짊어진 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떠난다. 각설탕 한 알에 담긴 '생존'과 머리 집게 하나에 담긴 '기억'을 교환한 채,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미래가 밝기를 바란다.
커버 이미지 출처: 스튜디오 지브리 공식 홈페이지, 본문 이미지 출처: 직접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