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olescence(청소년기)에 대해 고민하다
시청 플랫폼: 넷플릭스
회차: 4부작
저는 이 드라마를 재밌게 봤습니다. 작품이 가진 묘한 여운을 온전히 느끼신 후에 제 글을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시청 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드라마를 본 후, 한동안 글을 시작할 수 없었다. 학교 폭력, 성범죄, 교육 시스템의 붕괴, 그리고 SNS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 드라마가 던지는 사회적 문제들은 하나같이 민감하고 논쟁적이라 해결책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원제인 'Adolescence(청소년기)'가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한다.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쉴 새 없이 의문을 던진다. "누가 죽였는가"라는 단순한 흥미로움은 이내 "왜 죽였을까?"라는 본질적인 물음으로 변한다.
이 드라마가 주는 불편함은 '평범함'에서 온다. 기존 범죄물들이 사이코패스나 불우한 환경을 가진 '특수한' 인물을 가해자로 내새워 시청자에게 거리감을 주었다면, <소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의, 우리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소년을 가해자로 세운다. "혹시 내 아이도?"라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우리는 제3자의 위치에서 내려와 이 비극의 당사자가 된다.
나는 과거에 수학 선생님을 꿈꿨다. 수학의 명쾌함과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즐거움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필리핀 어학 캠프, 수학 강사 면접에서 나는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걸 보면 어떻게 하겠어요?"
"못 피우게 막아야죠."
"학생이 거부하면요?"
"...... 법적으로 미성년자가 담배를 못 피우는 거 아닌가요?"
나의 조심스러운 반문에 면접관은 눈이 동그래지며 소리 내 웃었고, 옆에 있던 직원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풋"소리를 냈다. 면접관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당시 20대였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캠프에서 겪은 10대들의 세계는 담배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인격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꿈을 접었다.
우리 세대는 복도에서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던 시대를 살았다. 기준 없이, 교사의 기분에 따라 체벌이 행해졌다. 그 불합리한 경험을 기억하는 부모들은 내 아이에게는 그런 일이 없길 바라며 체벌을 없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그 결과로 지금은 교권이 무너진 학교가 남았다. 체벌은 사라졌지만, 역설적으로 학교에서 인간적인 유대와 훈육의 기능도 함께 희미해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교사와 학생은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빨간 약'이라는 단어에 어른은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지만, 학생은 그들만의 개념을 말한다. 어른은 자신의 경험으로 아이를 재단하고, 아이는 그런 어른의 규칙을 비웃는다. 경찰들은 학교를 보며 "동물 우리 같다"고 탄식한다.
여기서 나는 친구 'A'를 떠올린다. 초등학교 6학년, 나는 덩치가 크고 욱하는 성격의 내성적인 아이였다. 교무실 복도에서 청소를 하다 A와 크게 싸우고 그의 머리로 교무실 창문을 깨뜨린 적이 있다. 100% 내 잘못이었음에도 A와 나는 담임 선생님의 면담에서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자 더이상 사정을 묻지 않고 담임 선생님은 평소 문제아였던 A의 잘못으로 단정 지어 친구를 몰아세웠다. A는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침묵했다. 그 침묵에 담긴 의미와 나의 침묵의 잘못됨을 느끼고 나는 엉엉 울며 내 잘못임을 고백하고 A에게 용서를 구했다. A 역시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하며 우리는 화해했다.
졸업 사진을 찍던 날, 선생님은 "5명씩 모여서 찍으라"고 했다. 내성적인 내게 5명을 맞추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 때 이미 평소 같이 놀던 4명과 무리를 이룬 A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 6명 같이 찍으면 안돼요?" A를 무심히 쳐다본 선생님은 그러라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5명이라는 틀이 깨졌다. 절친이 3명이라 다른 3명인 무리와 합치며, 빠질 1명을 고민하던 아이들부터 환호했다. 나처럼 고립된 아이들은 A가 "야, 나랑 같이 찍자"며 다가가니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이 뒤섞여 10명 넘게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A는 졸업 사진에 자신의 얼굴이 많이 나온다며 신나했다.
졸업 앨범 사진 속, 다른 반은 5명씩 맞춰 사진이 찍힌 반면, 우리 반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환한 미소는 우리 반이 가장 빛났다고 생각한다.
미성숙한 아이들은 이런 작은 충돌과 해결의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모든 것을 법과 원칙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이런 사회가 아이들이 스스로 성숙해질 수 있는 '과정'자체를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이미는 왜 케이티를 살해했는가. 그는 정말 케이티를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온라인 커뮤니티(매노스피어)의 왜곡된 이론과 결합하며 독이 되었다. "약해진 여성을 공략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비겁한 논리를 '똑똑함'으로 착각한 소년은,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신 자신이 거절당한 자존감에만 몰두했다.
제이미가 자신의 '어설픈 동정'이 케이티의 상처를 후벼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살인이 아니라 사과를 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칼을 건네준 라이언이 아니라,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한 친구 'A'가 옆에 있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지금의 교사는 학생을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하며 방임하고, 학생은 자신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 어른을 무시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제이미와 케이티처럼, 우리 시대의 교육 현장도 그렇게 무너지고 있다.
드라마는 철저히 가해자와 그 가족의 시선만을 비춘다. 나는 이것이 시청자를 방관자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제작진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 그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원테이크 촬영은 우리를 사건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다.
극 중 미샤 프랭크 경사는 "가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보는 것이 짜증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일까. 케이티는 자신의 노출 사진이 동급생들 사이에서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것에 극도로 괴로웠을 것이다. 피해자는 그저 그 일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 잊히고 싶어 한다. 우리가 '피해자 이름'을 법안에서 지워야 한다고 논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화에서 에디 밀러는 차에 적힌 '강감범'이라는 글자에 분노하며 페인트를 던진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재미'와 '가십'으로 소비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다. 에디 밀러에게 제이미를 지지한다고 말한 철물점 직원과 케이티에게 어설픈 위로를 전한 제이미의 상황이 겹쳐보이는 것은 무리일까. 아내와 딸을 보며 웃는 남자의 이야기에 밀러는 분노와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에디가 이런 상황을 만든 제이미에게 분노하기보다 미안하다고 눈물 흘리는 모습은, 결국 제작진이 이런 사회를 만든 우리 어른들의 공동 책임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양성이 존중받고 야만의 시대가 저물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사회에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맞으며 자란 에디 밀러는 아들을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았지만, 아들은 강력 범죄자가 되었다. 경찰들은 지금의 학교를 '동물 우리'같다고 한다. 체벌이 당연했던 시대와 체벌이 사라진 지금,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4화에서 가해자의 남은 가족들이 당하는 수모를 보며 '너무 가혹하지 않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렇다면 피해자의 가족은? 그들은 저들보다 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텐데'라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피해자 가족의 서사를 덜어낸 이유는 드라마가 그러했듯, 나 역시 글의 주제가 흐려지는 것을 막고 '가해라는 이름의 연쇄작용'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청을 마치고 할 말이 참 많아졌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분노에 중독되어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특정 인물을 낙인찍고 비난하는 글들이 가득하며, 그런 글들이 '베스트'가 되어 박수를 받는다. "심심한데 잘 걸렸다"는 식으로 사과 여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괴롭히는 모습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괴롭힐 대상이 필요하고, 누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이 뒤틀린 사회에서 개인은 다수의 폭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물리적 폭력이 당연했던 야만의 시대는 저물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비아냥과 냉소, 날 선 언어들이 채웠다.
교사와 부모가 직접 매를 드는 것은 멈췄을지 몰라도, 상대를 깎아내리고 소리 지르며 비난하는 모습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배운다. 청소년기는 기존의 것을 모방하며 자아를 만드는 시기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빨간 약'이 <매트릭스>에서 유래했듯, 하트의 색깔을 보며 꽃말을 떠올리는 나처럼 우리는 각자의 배경 지식 안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의 바탕이 되는 '원본'은 대개 어른들의 모습이다. 내가 교사라는 꿈을 접었던 이유, 그리고 지금의 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는 이유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 내가 과연 한 생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만큼 성숙한 인격체인가에 대한 의문 말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가해자 가족의 고통을 보며 피해자 가족의 슬픔을 떠올리고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가해자 가족도, 피해자 가족도,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상처 입은 아이들도, 모두 치유받을 수 있는 성숙한 사회를 희망한다. 물리적 폭력이 일상이었던 시대에서 비폭력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었듯,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정신적 폭력도 결국 사라지는 사회가 올 거라고 나는 믿는다.
커버 사진 출처: TMDB(The Movie Database) <Adolesc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