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강의를 시작하게 된 이유
구글 캘린더보다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를 좋아하고, 밀리의 서재를 구독함에도 매달 서점에 가며, 온라인 강의보다 오프라인 강의를 좋아하는 아날로그 인간은 어쩌다가 온라인 영어 선생님이 되었을까.
운명을 믿지 않지만, 이건 좀 운명이 아니었을까.
어느 대학원이나 그렇지만, 인문과학 쪽은 대학원생에 대한 지원이 작다. 조교를 하며 학비를 감면받긴 했어도 생활비는 필요했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에게 손 벌리기는 좀 그랬다. 서울에 조그만 집도 얻어주셨는데, 생활비까지 받자니 죄송하기도 하고 내가 너무 무능한 딸인 것만 같았다.
실험실은 작은 회사와 같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7시 정도까지 실험실 업무와 학업을 병행했다. 대부분의 시간이 랩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밤과 주말마다 과외도 하고 학원 강의도 했다. 하루 종일 쉴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실험실 생활 1년 반 만에 번아웃이 찾아왔다. 너무 좋아했던 일과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는 없었다. 음성학을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들어간 알바*같은 곳에서 시급이 꽤 높은 일을 발견했다. 온라인 녹화 강의였다.
접수 마감일이었기에 가지고 있던 서류들을 후다닥 보내고 기도했다. 붙기만 한다면 낮에는 실험실 생활을 하고 저녁에 강의를 찍고 주말은 쉬면서 공부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해서였을까, 서류도 통과하고 카메라 테스트와 시범 강의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후로 한참 동안 연락이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너무 떨었나, 시범 강의가 별로였나, 오만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을 갉아먹었다.
당시 실험실에서도 크고 작은 이슈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찍을 때였다. 일도 학업도 안 되는구나 싶은 마음에 열심히 모은 돈을 털어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착한 아이로 살아온 나에겐 굉장한 일탈이었다. 어디로 떠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서울에서 아주 멀리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 쪽이든 확실히 정하기로 결심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활비는 그저 표면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던가 싶다.
마음을 내려놓고 신나게 놀던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밤. 쳇바퀴 일상을 조금만 더 굴려보자, 좋아하는 공부니까 버텨보자 다짐하며 짐을 쌌다. 그 때 메일이 하나 왔다. (아마 한국은 이른 아침이었을 것이다.) 합격자인데 서류가 중간에 누락되어서 찾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괜찮다면 계약서를 쓰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세상의 모든 신들께 감사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묵직해진 캐리어로 돌아왔다. 2018년 1월이었다.
나의 모든 시작을 가능하게 해 준 곳이었기에 4년 동안 같은 조건으로 강의했다. 나름의 감사 표현이었다. 그러다 작년 실장님께서 이제는 정말 올릴 때가 되었다며 말없이 조건을 올려주셨지만, 계속 같은 금액이었다고 해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수업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고 재밌는 일이었다. 그렇게 카메라 앞이 점점 편해졌다.
이 일 덕분에 온라인 강의 경험을 쌓았다. 사이버대학교에 임용될 때 큰 장점으로 어필할 수 있었으며, 온라인 플랫폼에 강의를 열 자신감을 주었다. 지금의 N잡을 가능하게 한 시작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막다른 길에서 피운 새싹은 몇 년 만에 튼튼하게 자랐고, 나라는 세계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되었다.
때로는 우연한 선택이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실험실이 다 인 줄만 알았던 어린이를 세상 밖으로 꺼내 준 것은 그 해의 온라인 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