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은 니체가 철학자로 활동하기 전에 문헌학의 입장에서 그리스 비극의 성립과 추이에 관해 논증하는 책이다. 내용이 구체적이고 논리가 명확한 편이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영향력이 지대해서 그런지 몰라도, 니체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도록 문장을 비틀고 꾸역꾸역 글은 써봤지만, 쓰면 쓸수록, 기대했던 방향과 엇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표현을 굳이 빌려서 말하자면, 역겨워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조용한 공간이 글쓰기에 최적화된 장소이지만 오늘은 능력의 미약함을 두드러지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디스케이프'라는 카페를 찾았다. 그곳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건물이었는데 외관이 노을빛과 비슷한 붉은색을 띠고 있어, 뭔가 '사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1층에는 풍광과 함께 도란도란 앉아서 대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았고, 2층은 1층과 달리 어두침침했고, 마치 '재단'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곳은 로스코의 작품처럼 엄숙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고, 선율만 흐르는 음악은 이곳에 특별한 느낌을 더하여주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사람들은 올라와서 셔터만 눌러댈 뿐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의도치 않게 '비극의 탄생'을 음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얻게 되었고, 채광창을 내리쬐고 있는 햇볕을 받으며 독서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꿈의 세계의 아름다운 가상이 모든 예술의 전제이다.
'리비도'는 삶의 에너지, 긍정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즐거움, 쾌락, 만족, 생존을 추구하며. '타나토스'는 죽음의 에너지, 부정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고통, 좌절, 파괴, 죽음을 추구한다. 그리스의 미다스 왕은 현자로 알려진 실레노스에게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지혜를 구했는데, 그는 왕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차선책은 일찍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인간이 죽음에 맞서서 살아가려하는 것은 삶에 대한 충동이 죽음에 대한 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척이나 버겁고 힘겨운 일이었다. 압도적인 자연력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고, 대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좌절하고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대한 힘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의를 표하며 끝없이 그것에 도전했고, 차츰 고통은 익숙한 것이 되어갔다. 인간은 생을 대하는 노력 자체가 계속되면 될수록, 파괴적인 힘들이 생산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고통을 모방하여 비극으로 재현함으로써 예술의 형태로 승화시켰고, 그것을 개념화하여 신화로 만들게 되었다. 신화는 다시 예술로써 환원됨으로써 문명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인 '의지'는 하나이지만, 경험적 세계에서는 무수한 개체로 나타나게 된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형상이 아무리 선명하고 명료할지라도 인간은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부분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므로, 본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눈을 통해서만 인식한 것들은 불완전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들이 꿈속에서 통합되면서, 어떠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상징으로써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그것은 진리의 자격을 얻게 되었고 완전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이 이러한 꿈의 세계를 공유하게 되면서 그중에서도 이상적인 가치를 지닌 것들은 진(眞), 선(善), 미(美)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창조의 욕구들이 조형예술의 전제가 되었다. 이러한 특질을 가진 충동을 수렴하여, 니체는 아폴론적이라고 불렀다. 이성으로도 표상되는 이러한 힘은 수많은 개별의지가 만들어내는 허상을 들추어내며, 욕망에 내재하여 있는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모순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아폴론이 만들어낸 가상에서 위로받게 되었다.
미래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지만, 모든 현재는 항상 있을법한 상황으로 나타나고, 운명이라는 것은 예외를 모르는 법이기 때문에, 당해야 할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겪지 않고 좀처럼 포위망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때, 지금까지 베일 속에 숨어있던 은밀한 욕망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동안 가상이 보여주었던 아름다움 들은 실레노스의 지혜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되고,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 그대로 펼쳐지게 된다. 그러한 끔찍한 현실이 눈앞에 드러나 비로소 고통을 인식하게 될 때, 인간은 죽음으로의 충동 속에서 망아(忘我)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때 영혼은 가장 순수해지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니체는 이러한 충동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표현했다.
리비도는 아폴론의 특질을, 타나토스는 디오니소스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리비도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하지만, 타나토스는 소진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전자는 이성이나 사랑으로, 후자는 공격성과 파괴로 나타난다. 이러한 충동들은 본질적으로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로 융합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양쪽은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으므로 상황은 극한적인 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그럴 때 각각의 사물 속에 깃들어 있던 근원적인 모순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들이 고통 속에서 자기 망각 속에 빠지도록 만들 때, 개별화로 점철되었던 아폴론적인 충동들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상황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되고, 이때 디오니소스적인 근원적 욕망 속에 아폴론적인 삶의 의미가 새겨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각성하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모든 그것은 정당하며 부당하다.
아폴론은 망아(忘我)가 전해주는 황홀을 경험하기 위해, 디오니소스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환희를 맛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이러한 삶과 죽음의 원리를 보다 고차원적인 형태인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비극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때 음악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주었는데,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사티로스'였다. 사티로스는 상체는 인간이지만, 하반신은 염소의 것이며, 뿔을 가진 반인반수로서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의 화신으로 나오며,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상징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실레노스도 사티로스였으며,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었다. 비극은 원래 제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사티로스로 분장한 합창단들은 신의 매개체로써 음악을 통해 참여자들을 합일과 도취로 이끄는 역할을 하였다. 개인들은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점차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참가자들은 사티로스를 통해 아폴론 적 환영을 목격하게 되고, 자신의 상태를 관조하게 됨으로써 이전보다 새로운 존재로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술만이 실존의 공포와 불합리에 관한 저 구역질 나는 생각들을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표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 표상들은 공포를 예술적으로 통제할 때 숭고한 것이고, 불합리의 구역질로부터 해방하면 희극적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 일자와 관련한다.
인간은 세계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구분하였고, 그 틈에서 발생하는 차이들을 비극을 통해 이해하여 삶을 예술로써 승화시켰다. 니체는 이러한 것을 '자기애' 또는 '운명애'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자기란 영혼인 자아까지 포함하며, 그것은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가 됨으로써 온전하게되는 것이므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정열적인 욕구로서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창조한 의지 그 자체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전쟁에서 이겨버린 후, 해상전력이 우수했던 아테네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역경을 이겨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그리스 사회는 무절제한 자유와 향락에 젖어들게 되면서, 삶의 모순을 직시하게 만들었던 비극을 점차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양자 간에 대립이 격해지기 시작했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그리스 문화의 원동력이었던 개별성이 사회를 유지해 주던 보편성 -신화와 예술-에 균열이 일어나도록 만들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는 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해, 각각 철학과 비극을 통해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했으나, 그것은 특기할만한 결과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는 '이데아'는 오히려 본질을 망각하게 했고, 간절한 바람을 담았었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그리스의 정신을 '기계장치의 신'에게 의지하도록 했다. 니체는 예술의 추락을 이들에게서 책임을 묻고 있으나, 전적으로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 사회 자체가 타락함으로써 예술의 기능도 함께 추락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최고위험 속에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를 이용하여 다가온다.
생명은 성장하고 표현하며 스스로 살아가는 특징이 있어서 이러한 성향이 좌절되게 될 때, 생명을 향하던 에너지는 붕괴하는 과정을 거쳐 파괴로 향하는 에너지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 자체는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증상이 계속되면 문제점을 진단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러한 고통의 순기능을 외면하고 밝고 긍정적인 면모로만 겉을 포장하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개별화는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게 만들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개인적 특성이 있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어떤 자질과 개성을 훈련하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성과를 얻어 돈을 벌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다. 하지만 연출된 것들이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스트레스 증세로 나타나고. 아무것도 느낄 정도로 감정 자체가 마비되어 버릴 때, 삶과 생명력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가상의 실재에 불과하고, 그로써 겪게 되는 고통은 그동안 숨겨져 있던 것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존의 고통을 여러 번 겪었다. 아마도 그 과정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했으면,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고, 그 기억을 꺼낸다는 생각 자체도 못 했을 것이다. 그것들은 글감으로 여러 번 꺼내서 이제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나는 고통이 주는 감각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긴장의 끈이 풀리는 순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각을 불러일으켜 주는 매개체들은 장르에 상관없이 나에게는 모두 예술이 된다.
밖으로 나가니.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였고 현관에 있는 조명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몰랐는데, 버스정류장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멘붕이 왔다. 그래서 직원한테 버스 타는 장소를 물어보니, 좌회전해서 사거리까지 쭉 내려가 길 건너지 말고 버스를 타야 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일단 내려가서 사거리를 찾긴 했는데 여전히 정류소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9시쯤에는 차가 끊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30분 정도 기다리다 보니 슬슬 걱정이 밀려오게 됐다. 그러다 버스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하고 손을 흔드니, 문이 열렸다. 여기가 정류장이냐고 기사에게 물어보니, 지나가다가 사람이 보여서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쿵'하고 소리가 나며, 바퀴가 기찻길에 빠지면서,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맞은편에서 들어오던 버스의 기사가 이를 보고, 바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어 다행히 지하철 역까지 갈 수 있었다.
필연적인 운명을 감당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사랑하라!
철학과 예술이 취미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은 내게 돈이 많이 들지 않냐고 물어보거나, 그게 무슨 재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에는 시간이 좀 걸릴 뿐 별로 돈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조합하여 글을 쓰는 행위는 나에게는 게임보다 재미있는 놀이이다. 남들이 보면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저렇게도 열심히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지만, 사실 나는 그러기 위해서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버는 중이다. 그게 사치라면 사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써 대상을 좀 더 생생하게 그려내고 싶을 뿐이다.그러한 소소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나만의 철학이자,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