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의 정복 >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행복론에 앞서 내 자신의 애기를 조금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행복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2) 15
요즈음에는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성격 등 여러 측면에서 완벽한 사람을 의미하는 '육각형인간'이란 개념이 유행하고 있다. 이 용어는 2024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현대 사회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이러한 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추었을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자 모든 행동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운명을 ‘인격’, ‘소유’, ‘인상’으로 분류하였는데, 먼저 인격을 이루는 것으로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동덕성, 예지와 예지의 함양을 들었고, 소유는 인간은 지니는 것이라고 정의했으며, 인상은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어 보이는 것으로써 명의, 지위, 명성 등을 말한다고 했다.
버트런드 러셀도 기본적으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으나, 그것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쟁취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불행해지는 원인을 잘못된 세계관, 그릇된 윤리, 좋지 못한 생활 습관에서 찾았으며, 이를 개선하면 누구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큰 문제에 있어서나 작은 문제에 있어서나 남의 의견을, 전문가의 의견은 다른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3) -132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고유한 기능이나 활동을 잘 활용할 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본래 좋은 운수를 뜻하며, ‘행운’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현실에서의 행복은 삶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며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이 단순히 운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 보았는데, ‘정복’이라는 단어는 다루기 어려운 대상을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며, 한편으로는 ‘맑고 조촐한 행복’이라는 단어와 동음이의어 관계를 이루고 있다.
러셀은 행복의 원인을 열의, 사랑, 가족, 일, 일반적 관심사, 노력과 체념으로 설명했다. 그러면 불행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는 불행의 가장 큰 원인으로 청소년 시절에 만족을 박탈당한 경험을 지목하며, 어린 시절에 정상적으로 만족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특정한 욕구를 과대평가하여 삶의 다양한 가치들을 놓치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의 애정이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성취에 대한 기대감으로 변할 때, 아이는 외적 성공만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이는 삶의 다양한 즐거움과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여 끊임없는 경쟁과 성취 욕구에 지배되는 삶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면, 그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보다 무엇을 슬퍼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즉, 행복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기쁨의 크기가 아니라, 고통과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욕망과 기대는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며, 다양한 의지와 외부의 자극이 많아질수록, 러셀이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한 경쟁, 피로,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 등이 강하게 작용하며, 고뇌의 강도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러한 욕망과 기대가 줄어든다면 고뇌 또한 감소하게 될 것이다.
고뇌가 적극적인 것이라면, 행복은 소극적인 것이 되며, 그렇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행을 피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단순한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고통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행복을 재정의한다면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개척하고, 의미 있는 목표는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성취나 역동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조화와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속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결국, 행복을 정복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 속에서 의미와 충만함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탈이 명량하고 태평스러운 태도로, 즉 반항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행해진다면 가장 인습적인 사회에서조차도 얼마든지 용인받게 될것이다. 그러다 차츰 모두가 인정하는 일탈자처럼 되어버리면, 다른 사람의 경우리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도 그에게는 허용되는 것이다. 4)128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르고스의 눈은 끊임없는 감시의 상징이다. 그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는 이오를 밤낮으로 감시하다가, 결국 제우스의 명을 받은 헤르메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헤라는 그의 눈들을 공작의 깃털에 장식하여 남겼다고 전해진다.
공작새는 아르고스의 눈이 깃털에 새겨져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요소로 받아들인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의미에서 공작새를 평화로운 새라고 불렀다. 반면, 인간은 공작새처럼 자신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만족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래서 매번 삶을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행복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우리의 결론과 전제뿐만 아니라, 세상이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꼬리털 없는 공작새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을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위축되거나 불안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시가 지속될 때, 정신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신체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게 된다. 만약 그 시선이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는 아르고스라는 괴물에게 감시받는 수인(囚人)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적 기준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 대상에 대한 부분적인 지위와 역할을 지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그것만으로 온전한 '나'를 이루는 것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복과 사회적 기준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 이를 통해 자신의 방향성을 정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과정 속에 행복이 깃들게 된다는 사실이다.
폭넓게 말한다면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자를 받기 위해 돈을 빌려주듯이 계산을 한 끝에 사랑을 주려고 하는 것은 무익하다.5) 235
러셀은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이자 자유로운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며,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통해,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사랑과 관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더 나아가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자유롭게 우주가 주는 장관과 환희를 즐긴다. 또한, 자기를 뒤이어 오는 사람들과 실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도 괴로워하지 않는다.”라고도 말했다.
러셀은 행복을 단순한 개인적 만족이 아니라,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행복이 단순히 개인적인 성취나 쾌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확장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결국, 행복이란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가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풍요롭게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습에 지나치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남녀들로 구성된 사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회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는 사회이다. 각자의 성격이 개성적으로 발전되는 곳에서는 각양각색의 성격이 그대로 보존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 된다. 새로운 사람들은 이미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단순한 복사가 아니기 때문이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