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구라모토 #클로드 모네 #음악 #미술
전철이 한강을 지난다.
어느새 책 속으로 빠져든다.
익숙한 듯, 낯선 그 단어
왠지 슴슴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심코 넘긴 종잇장에 붙들려
눈은 묵묵히 활자를 따라간다.
왜일까?
갑자기 목이 메어온다.
다시 앞장을 뒤적인다.
무엇이 붙잡는 것일까?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전철이 그곳을 지나간다.
어느새 눈가가 젖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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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철을 타고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은 늘 챙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환승이 적은 노선을 택하고, 음악을 켠 채 책 속으로 들어간다.
음악의 분위기와 책의 감상이 맞닿을 때면, 텍스트가 음악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그 여운을 천천히 곱씹는다.
지하철 안에 멍하니 앉아,
졸려도 잠이 오지를 않네.
여러 악기가 겹치거나 가사가 있는 곡은 독서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나는 한 음 한 음이 또렷한 피아노 독주를 더 선호한다.
지하철에 오르기 전, 플레이리스트에서 유키 구라모토를 골랐다. 같은 연주라도 앱의 주간 레퍼토리가 바뀌면 듣는 맥락이 달라져, 곡의 결이 새롭게 들리곤 한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면, 그 얼굴의 특징들은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지고, 결국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함께했던 장소와 풍경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문득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을 떠올린다. 붙잡고 싶은 얼굴은 흐릿한 윤곽만 남고, 그 공백은 다른 이미지들을 기억 속으로 빨아들인다.
결국, 시간이 지나도 선명히 남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와 함께 바라보았던 풍경이다.
알 수 없는 흥분이 곁을 스쳐가고—
형태, 관계, 차이조차 무의미해진
어떤 색채들이 어지럽게
자꾸만 어른거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사랑의 기억’이 흐르기 시작한다. 은은한 멜로디가 공간을 가만히 채워가며, 마음속 어딘가에 닫혀 있던 오래된 문 하나가 조용히 열린다. 그 선율은 잊고 지냈던 기억의 틀을 조심스레 그려내고, 그 위를 감싸는 현악은 그 틀 안에 이름 모를 감정을 하나하나 채워 넣는다. 음악은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어느새 하나의 이미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종잡을 수 없이 그윽한 감각,
마치 안식처를 찾게 된 듯
따뜻하게 나를 감싸는
어떤—
점점 고조되는 흐름 속에서,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애잔함과 간절함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그 감정들은 폭풍처럼 마음을 휘감는다. 숨겨왔던 마음의 응어리들이 절정의 순간에 터져 나오며,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찬 울림이 일어난다. 그 울림은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다만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실을 끌어당기듯
장면들이 이어지고
한데 그러모아서
그림 하나를 그리려 했다.
곡이 끝나갈 무렵이면, 격정의 파도도 서서히 잦아든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고요 속으로 스며들고, 그 자리에 무언가가 남는다. 나는 그 잔상을 가만히 응시한다. 아무 말도 없이, 그 여운 속에 머문다.
“동그라미 그리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가사가 그 여운 위에 겹쳐졌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그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
비치는 햇살,
그리고 그림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그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의 눈, 코, 입을 하나씩 그려보지만, 내가 그리워하던 생김새는 아니다.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결국 얼굴을 완성하지 못한 채 흐릿한 형태로 남겨두고, 안타까움 속에서 텅 빈 마음의 공백에 그녀와의 추억을 하나씩, 조심스레 채워 넣는다.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내 안에
스며들어,
하늘거리고 있었다
노래가 끝났고, 지하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