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춤, #앙리 마티스

by 비루투스

이번 독서모임의 선정 도서가 시집이라는 사실은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를 가지고 모임을 한다니, 진행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끌지 모르겠지만 그 발상 자체가 흥미로웠다. 이번 주제 도서는 두 권, 한강의 시집과 진은영의 작품이다.


나는 가끔 시를 쓰곤 하지만, 정작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이번 모임에 참석하려면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는데, 시집을 다 읽고도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한강의 작품은 소설가답게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반복되는 코드가 보여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진은영의 시 세계는 주지적이라기보다 주정적인 성향이 강해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시는 논리적 설명보다는 감각과 정서의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험 없이 단순히 생각만으로는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마도 내가 진은영이라는 시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리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낯섦이야말로 시가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시는 이해하기 쉬운 구조나 설명이 아니라, 낯선 감각과 정서를 통해 세계와 나 사이의 틈을 드러내고, 그 틈을 체험하게 만드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두 권 모두 어둡고 처연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서인지 ‘한’의 정서가 깃든 듯했고, 세련된 문체로 잘 쓰였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정서가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시인의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박도 가능하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그 스타일을 선호하는 독자층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소설은 연출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지만,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에 특정 정서나 방식에 갇히기 쉽다. 그러나 같은 코드가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삶의 다양성을 관조하는 힘이 약해진다. 삶을 유토피아적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다른 모든 것은 디스토피아적 요소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록 음악에 록 발라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탈도 있듯, 시 역시 재즈처럼 구조와 틀을 흔들 필요가 있고,이를 위해서는 세계의 구조와 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추상이 구상에서 나오듯, 구상 또한 추상에서 비롯될 수 있다. 삶 또한 그러하며 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하나의 단어에는 정확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관계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동의어와 반의어, 대조와 대비, 유추와 비교 등 여러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어 하나하나에는 발아의 씨앗이 움을 트고 있다. 그 씨앗은 바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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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 써지지 않아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 근처 카페로 향했다. 창밖으로 서순라길 담장이 보이는 작은 북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늘 심사대에서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가, 이렇게 바라보는 입장이 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 순간 ‘시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국어를 오래 공부했지만, 시를 즐기거나 직접 써본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발령 대기 기간에 어머니와 함께 ‘인문학과 시창작’ 시민강좌를 수강하게 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시를 창작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보고 즉석에서 시를 쓰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쓴 ‘축제’라는 시는 지금도 내게 특별하다.


나는 원래 서정적인 시를 곧잘 쓰는 편이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할 때 선언적이고 강한 방식으로 쓴다. 나는 '돌담에 햇발같이'라는 아름다운 시어를 읊었던 김영랑 시인의 '독을 차고'란 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과 자세를 정돈하곤 한다.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 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카뮈는 삶의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자살이나 초월적 믿음에 기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내는 ‘반항’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시는 내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나의 반항이며, 나는 반항으로 반향을 일으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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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지 말지어다.

어차피 망상인 것을,

스러져갈 것을 위해 살지 말라.


간신히 꽃을 피우더라도,

비 한 번 몰아치면 그만이다.

누가 감히 영원을 논하는가?


같은 꿈은 같은 삶을 박제할 뿐,

청춘은 생각만큼 푸르지 아니하고

우리네 삶도 그렇게 아름답지 아니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나아갈 뿐,

잠시라도 이 생을 멈춰 세울 자 없으리로다.


거친 바다의 향연,

그것이 바로 청춘.


심연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생의 감각,

이성이 숨죽이고 무지가 지혜가 되는도다.


그것을 온몸으로 찬양하라!

그것을 정면으로 맞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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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당시 니체의 ‘아모르파티’와 마티스의 「춤」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 삶을 정면으로 맞이하려는 선언이자, 죽음을 동시에 사유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생각해 보면 나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기대를 잔뜩 받았고, 그에 따르는 삶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아 왔다. 나이를 먹어가고 어느 집단에 속하면 속할수록 따라야 할 의무가 주어졌고, 그것을 나의 의지인 양 착각하며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가스라이팅’에 지나지 않는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완독했을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고, 『안티크리스트』를 읽으며 내 안에 만들어진 신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신에게 복종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의무가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명확하게 그려지는 꿈은 없었지만, 적어도 내 꿈은 내가 꾸고 싶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의식까지 깊이 새겨진 단어들과 싸우는 것이었다.


눈이 뜨이고 나자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자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점점 가까이 내 주변으로 번져왔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 세상에 태어나 어떤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적어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두렵다고 눈을 감는다고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죽음과 함께 사는 방법을 택했다. 공포와 불안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알고 익숙해지다 보면 일상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담담해진다. 나만 무서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내 한계를 인정하고 주어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긴장관계의 밀고 당김을 유지할수록 내가 가진 에너지도 함께 움직였다.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꿈은 만들어가는 것이며, 무의식 중에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일 뿐,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으면 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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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근본 모르는 진주로 장식되기보다

사연 많은 처절한 고통을 택하리라.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하얗게 일렁이는 거품 속에 던져라.


그러하다, 젊은이들이여.

모든 허울을 벗어던지고 미친 듯이 춤을 추자.

손에 손잡아 어우러지며 서로에게 마주 하자!

더욱더 크게, 점점 다가가

세상이란 괴물을 생포하라.


지옥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천국이 오는 법,

타다 남은 재 속에서 생은 다시 부화하는 도다.


결국 깨닫게 되리라.

삶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을.


어디서든, 어떻게든 시작되고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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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내가 직접 쓴 문장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가지는 표현이다. 명함 뒷면에 새겨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좌우명이 아니라, 나의 예전 모습에 대한 반발이자 세계에 대한 선언이었다. 나는 원래 앞에 나서는 것을 낯설어했지만, 삶은 언제나 나를 맨 앞에 세워 정면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군대 시절 방패를 들고 맨 앞에 섰던 경험은 내 삶 전체를 비추는 메타포가 되었다.


나는 입으로만 떠들지 않는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지 마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통이 더해질수록 내 가슴은 두터워지고, 내 다리는 날아오를 듯 가벼워진다.


나는 아직도 청년이다. 하지만 오늘날 ‘청년’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힘과 패기의 상징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은 안타깝다. ‘청년센터’, ‘청년우대’, ‘청년식당’이라는 이름 속에서 청년은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대상, 혜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 듯하다.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그러나 니체에게 청년은 강자였다. 그는 자기 삶의 주인이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자였다. 청년은 타인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교훈을 얻고, 의식적 노력에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쳐 삶을 쟁취한다. 진정한 젊음은 그 과정 속에서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며,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데 있다.


나는 믿는다. 자신의 삶을 짊어질 수 있는 자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아 연대할 때, 이 땅에도 새로운 천국이 도래할 수 있다고. 그러나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길들여진 개가 되기보다 황야에서 울부짖는 한마리의 늑대가 되겠다.

그대들은 물밀듯이 다가오는 생의 감각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진정한 청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며, 고통 속에서도 희열을 발견하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의지로 세상을 돌파하는 자이다. 그대들은 의지의 불 앞에서 마땅히 춤을 출 자격이 있다. 오직 그러한 초극의지만이 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다.


결국 시는 나에게 단순한 감상의 언어가 아니라, 행동의 기록이자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식이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의미를 새기는 의식이 곧 시다. 나는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속에 서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긍정하고 살아가려 한다.


시지프스의 바위가 다시 굴러내려 오고 있다.

“와라. 세상이여!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