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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향 Jan 25. 2022

사주 보러 갔다가 전생 보고 왔다 1

전생에 강제 모태솔로였다.

나는 누군가가 내게 호감이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 도망가고 싶어진다. 내 허락 없이 성큼 다가온 발자국을 보면 금방이라도 내 세계가 이용당하다가 버려질까 불안감이 든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마음이 있어야만 이어지는 관계를 추구하며 살아왔다. 우정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꽉 막힌 사람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지도 모른다.


올해 초 친구가 내게 사주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내가 절대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평소에 자주 가던 사주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하고, 하고 싶은 질문을 정리했다.


1. 저 올해 등단할 수 있나요?

2. 저 올해 괜찮나요?

3. 프리랜서로 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4. 저 올해 복학하는데 잘 살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뿐이었다. 정리하면서도 허접한 내용에 헛웃음이 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하는 건 알았지만, 딱히 궁금한 게 없었다. 새해가 되며 심적으로 초연해진 상태였기 때문일까. 과거를 잘 맞추면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더 질문해보기로 하며 리스트 작성을 마쳤다.


저기, 이 나잇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 없는 것 같다고 느끼지 않았나.

맞다. 연애운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25살까지 남자를 사귀지 않아 마법사가 된 케이스로, 주말 오후 아웃렛에서도 주차장 1층에 차를 세울 수 있게 하는 기가 막힌 능력을 지니고 있다.(사실 이전에도 그랬다. 미리 나타난 마법사의 재능일 듯.) 엄마가 마트에 갈 때마다 조수석에 날 앉혀놓는 이유지. 21세기, 인구가 과밀화된 도심에서 부릴 수 있는 이 사치스러운 마법의 힘을 잘 즐기고 있는데 애인이 뭐가 필요한가?


모쪼록 등단만 할 수 있다면 영혼 3g 정도는 팔 수 있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친구와 함께 사주 카페에 방문했다.  아니 그런데! 오픈 시간에 맞춰 온 우리보다 부지런한 손님이 있지 않던가. MBTI J들로서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다음에는 5분 일찍 올 것, 다짐하며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10분 남짓한 대기 끝에 사주를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듣고 싶은 말을 한 구절 들었다. 창작을 하며 살아야 하는 팔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둘기처럼 순수문학을 두고 이것저것 손 대보려는 내게 "장르 쪽으로 빠져도 괜찮지만, 성격이 심각한 용두사미다."라는 팩트도 말씀해주셨다. 내가 제일 고치고 싶은 점이었기에 뜨끔했다.


게다가 내가 현재 고민이 별로 없다는 것도 맞추셨으니, 소름이 안 돋을 수가 없더라.

마지막 질문에서는 급기야 입을 틀어막고 놀랐는데.


"저 올해 복학하는데 학교 생활 잘할 수 있을까요?"라는 마지막 질문에

"학교 다시 가게요? 학교는 대충 다니면서 혼자 글 써요. 그게 나아요."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복학을 앞두고 내가 세운 계획이 딱 그렇다. 어떻게 알았을까.


게다가 또 휴학하고 싶은 내 마음에 불까지 지펴 주셨다. 일 년 더 쉬어도 상관 없다는 말을 먼저 해주신 거다. 흡족해하며 시계를 보았다.


둘 다 질문을 많이 준비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사주를 모두 봐버렸다. 어떻게든 궁금한 걸 쥐어짜 보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서비스로 전생을 이야기해주겠다고 하셨다. 수련을 하셨기에, 앞에 있는 사람의 전생이 보이신다고.


전생? 나 전생에 불가사리였을 텐데 그게 보일까?


신기하니 집중하자, 라는 마음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불가사리, 돌멩이, 한량 선비 등등 내 전생에 대한 추측들이 떠올랐다. 생활 패턴을 봤을 때 가장 가능성 있는 건 불가사리였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손님은 전생에 궁중 음악가였어요.


청음도 안 되고, 음정도 못 맞추는 내가, 노래방 가면 탬버린 담당인 내가

전생에 궁중 음악가였다니.

그것도 왕한테 애인을 모두 빼앗긴, 유일한 남자 궁중 음악가?


순간 내 전생과 관련지어져 떠오르는 장르가 있었다.

이거… 로판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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