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예찬 일기
삿포로에 왔다. 21살 5월에 다녀온 삿포로의 기억이 좋아서 26살인 올해 11월에 다시 방문했다. 5월의 삿포로는 파란 하늘에 구름들이 예쁘게 펴있었다면 11월은 구름 한 점 없이 적막했다. 장식이 사라진 빈 하늘에 차가운 바람만이 맴돌았다.
회전 초밥을 먹고 나와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려고 호텔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벌써 창 밖은 어둑어둑했다. 옷을 따뜻하게 갖춰 입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도착했다.
11월 삿포로의 밤을 마주하니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냥을 미처 팔지 못하고 추위에 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질 즈음 소녀는 성냥을 한 개비씩 태우며 따뜻한 꿈을 꾼다. 한 개비에는 따스한 벽난로가, 다른 한 개비에는 맛있는 식사가 차려진 식탁이 피어오르다 아스러진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개비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따뜻한 모습이 피어오른다. 삿포로의 밤은 성냥팔이가 피운 성냥불이 아롱아롱 피어있었다.
한 블록을 걸어 지나칠 때마다 가로등 모양이 바뀌었다. 삿포로 그랜드 호텔 앞에 위치한 거리에는 붉은색 벽돌로 이루어진 기둥에 네모난 모양의 가로등이 서있었다. 유서 깊은 고상함이 강조되고 있었다. 자부심이 매달려 있었다.
술집들이 이어져있는 뒷골목에는 높고 위, 아래에 각각 전등과 같이 달려있는 가로등이 있었다. 골목의 구석구석을 밝혀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양 옆으로 4개의 등불들이 길을 따라 나열되어 있었다. 거리가 온통 가로등 불빛으로 붐볐다. 모두에게 허용되는 불빛이다.
청사가 보이는 광장의 양 옆에는 노란 은행나무와 동그란 모양의 가로등이 줄 서 있었다. 동그란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은행나무 잎과 만나 노란 광장을 만들어 냈다. 광장의 아스팔트 바닥에도 노란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공간은 따뜻한 노란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길 잃은 자들을 부르는 노란빛이었다.
삿포로 역 앞에 위치한 시계가 달려있는 가로등에는 1900년대의 가로등일 법한 전등이 3개씩 달려 있었다. 시계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가로등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이곳의 불빛은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삿포로의 겨울에 이들은 따뜻한 성냥불의 꿈을 꾸지 않았을까. 잔뜩 쌓인 눈을 치우면서도 잠깐 하늘을 바라보며 따뜻한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 한 블록 한 블록마다 이들의 다양한 꿈이 빛나고 있었다. 삿포로의 밤은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