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의 엄마인 내가 육아휴직을 길게 보내고 복귀했을 때, 그녀는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막 입사한 상태였고 우리 둘은 실업급여팀 수급자격창구로 발령받았었다. 공정한 행정적 판단을 요하는 고난도의 업무지식을 갖추어야 하기에 처음엔 우리 둘은 쩔쩔매면서 땀을 흘려가며 서로의 성장을 도왔었다. 특이사례를 함께 공유하고 과격한 민원인을 응대한 후엔 서로를 위로하며 동기간처럼 애틋하게 지냈었다. 뛰어난 업무처리능력에 겸손하고 상냥하기까지 한 그녀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직원들이 참으로 좋아했었다.
하지만 2년여 세월이 지나고 서로 팀 내 업무분장이 달라진 후, 그녀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왜 날 피하는지 따져 물은 적은 없지만 그저 그녀의 감정을 존중해주고 싶어 굳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울면서 일하는 그녀를 목격했다. 이유를 물으니 경남 남해에 사는 외할머니께서 노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를 안아주며 남은 일은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얼른 바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리고 회사 팀 내 모든 팀원분들에게 일일이 그녀의 외조모상을 알리고 조의금을 주실 분은 문상가게 될 내편에 전달하라고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장례식장이 왕복 8시간이 걸리는 경남 남해이고, 개인 연가까지 반납하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문상 갈 멤버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하루라도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면 업무공백이 큰 팀이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30명 모든 팀원이 조의금 봉투를 주었고, 팀장님․ 동료․ 나 이렇게 세 명이 문상을 가기로 하였다.
그날 당일은 막차 버스표가 없는 관계로 그다음 날 연가를 내고 셋이서 남부터미널에서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경남 남해, 우리나라 최남단... 사실 이렇게 먼 곳을 갈 일이 그간 없었다. 게다가 멀미가 심하고 화장실도 자주 가는 편인 내가 기차도 아닌 고속버스를 타고 남해를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울고 있는 그녀가 순간 눈에 밟혀 무작정 덮어놓고 용기를 내었지만 막상 버스 타는 내내 화장실 마려울까 밥도 못 먹고 그 좋아하는 커피 한 모금 못 마시고 멀미를 할까 잠을 억지로 청해야 하는 신진대사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버스가 중간에 한번 쉬는 휴식시간 10분 동안 얼른 화장실을 다녀오고, 팀장님이 그 짧은 막간에 사준 가락국수를 국물은 마시지 않고 면 몇 가닥만 먹으며 식탐을 겨우 진정시켰다. 물론 가락국수를 먹다 휴게소 복귀시간을 1분 지각하는 민폐를 저지르기도 하고 버스에서 떠든다고 주의를 받기도 했다. 고용센터에서는 동료들이 주무관이라 서로를 칭해주고, 민원인들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며 존중해 주었는데, 직장을 벗어난 우린 그저 평범한 아저씨·아줌마일 뿐이었다.
“아이, 아저씨ㆍ아줌마~빨리 타요. 댁들 때문에 출발 못하잖아요.”
“에~헤이~, 아저씨ㆍ아줌마 때문에 다른 승객들 잠 못 자잖아요. 여기서 떠드시면 안 됩니다.”
기사님의 훈계말씀에 우린 다시 한번 인생은 겸손하게 사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4시간여의 멀미를 참고 도착한 남해... 하늘은 진파란색이고 주변은 선명한 초록색 밭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기대한 것보다 아늑하고 포근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고속버스를 타며 지나온 계단식의 다랭이마을과 새빨간 남해대교는 앙증맞음 그 자체였다.
문상 1시간 후 바로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버스를 끊어놓았기에 주변 경치에 잠시 취하였던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남해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다. 어제 문상을 간다고 했을 때 그녀는 한사코 오지 말라고 만류했었다. 그래서 오늘 방문은 그녀에게 엄청난 서프라이즈가 될 듯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조의화환은 많이 있었지만 상복을 입은 분들만 있고 문상객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최남단이기도 했고, ‘코로나19’라는 것이 중국 우환에서 발생된 구정 직후 시점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멀리서 우릴 보고 그녀가 달려왔다. 회사 조의 깃발을 힘겹게 가져온 우리는 조기를 신속히 설치한 후, 내 가방 멘 아래 꼬깃꼬깃 손수건에 싼 팀원들의 정성 어린 조의 봉투 30개를 꺼내어 조의방명록에 그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상주님의 자손들이 똑똑하여 모두 국내 굴지의 대기업ㆍ공사에 재직 중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직접 남해까지 문상을 온 것은 그녀뿐이어서 그녀의 사촌들은 모두 부러운 듯 “야, 대기업ㆍ공사 다 필요 없다. 고용센터가 의리 최고다.”라는 말을 연신 연발하였다.
고인께 예를 다하고 상주와의 인사를 마친 후 그녀의 안내에 따라 상차림을 받았다. 막 무친 남해 시금치, 홍어무침, 가자미 튀김, 떡, 편육, 육개장, 동그랑땡, 과일 등이 한 상 차려졌다. 무엇보다 남해특산물 시금치가 최고였다. 남해 시금치는 해풍을 견디고 자라 특히 달고 맛있다고 한다.
한 시간여의 짧은 문상을 마무리하고 나오려는데 경상도에서는 경조사 때 손님에게 거마비조로 교통비를 주는 풍습이 있다며 그녀의 어머님께서 꼬깃꼬깃 흰 봉투를 주셨다.
한사코 거절하고 나오려는데 그 어머님의 눈과 그 아이의 눈이 똑같이 겹쳐 보였다. 모녀의 뒤 배경으로 펼쳐진 시원하고 청량한 푸른 바다... 를 닮은 아름답고 예쁜 눈...
아...... 외할머니ㆍ어머니ㆍ딸...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유전자의 힘, 조상님의 마음, 고향의 정서... 이 엄청난 기운이 이어져 내려오는구나. 그래서 가족이, 사람이 아름답구나. 이 벅찬 감동이 파도처럼 한순간 밀려왔다.
그래, 이 아이는 진지하게 자신만의 업무스타일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었구나. 이 아이가 나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인생의 경험이 깊어진다면, 속의 말을 굳이 다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해되는 시간의 힘을 알게 되겠지. 묵묵히 외할머니처럼 품어주고 채워주었던 나의 진심도 그때 즈음엔 깨닫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