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고요로 덮히는 깊은 밤

by 미쉘 송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할머니, 엄마, 아버지를 생각해 봐도 그렇다.

늘 새벽이면 마당 쓰는 소리, 부엌에서 들리던 부산스러운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어른들의 아침잠은 다 어디로 달아난 걸까?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때의 나는 자도 자도 아침잠이 모자라는 잠꾸러기였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자식들이 나태하게 늦잠을 자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 들판을 다 돌고 대문을 들어서면 늘 기침을 하셨다.

그건 나에게 보내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버지께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안 일어나 있으면 그날은 아침부터 꾸중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야단치는 걸 원치 않으셨던 듯하다.

그러니 일부러 기침소리를 신호를 보내 내게 이부자리를 정리할 시간을 준 것이었다.

'으흠~' 하는 소리에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개 이불장에 넣고는 꽤 오래전부터 일어나 있었던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 갱이 일찍 일어났네. 사람은 아침을 일찍 열어야 하는 기다" 하시면 웃어주셨다.

물론 내가 좀 전에 눈 떴다는 걸 아셨겠지만, 야단 대신 칭찬을 할 수 있어 흡족해하신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의 꾸지람이 무서워 억지로 일어났다면, 지금은 지각이 두려워 일어나는 셈이다.

문제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아침잠이 많다는 것이다.

왜 저 말은 내게는 통하지 않는 것일까?

아침형 인간들이 제일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아침형 인간이 되어 보려 노력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왔다.

새벽 운동, 영어 공부 등을 시도했지만, 새벽 기상의 후유증은 일상을 흔들었다.

차라리 밤을 새우는 것이 쉽다.

고등학생 때는 읽던 책을 덮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우고 등교를 하곤 했다.

40대까지만 해도 미국 드라마에 빠져 다음 편까지만, 다음 편까지만 하다가 환해져 오는 창밖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렇다. 각자 본인에게 맞는 시간이 있다.

아침형 인간이나 올빼미족이나 각자 맞는 것을 취하면 되고, 꼭 나눌 필요도 없는 사안이나

굳이 나누자면 나는 올빼미족에 가깝다.



어둠에 싸인 사위가 고요한 적막에 빠져드는 시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바쁜 하루를 살아낸 내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여유로움이다.

그 시각엔 뭘 해도 집중이 잘되고 쉬이 빠져든다.

글을 쓰는 일도, 쓴 글을 고치는 퇴고도 그 시각이 제격이다.

생활의 노이즈가 사라진 공간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여 몸과 마음을 이완시킨다.

어느 위대한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아라비안 풍 가운을 입고 슬리퍼를 신어야만 펜을 잡았다고 한다.

운동선수들도 그런 물건들이 있어 경기 전에 꼭 챙긴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런 물건들의 역할은, 이성적으로 논하기보단 정서적으로 맘을 편하게 하고,

결과를 좋은 쪽으로 이끄는 것이다.

어쩜 나약한 마음을 지키게 하는 힘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달라는 희망과 응원의 도구일 것이다.

나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면 항상 음악을 켠다.

음악으로 이완된 몸과 마음은 마법처럼 마음을 읽어내고 글로 만든다.

적막한 고요를 흔들지 않고 심연을 향하게 하는 음악은 글쓰기와 좋은 콜라보를 이룬다.

글쓰기와 음악의 환상적인 콜라보는 시너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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