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라진 보물 1호

by 미쉘 송

내 나이 아홉 살! 여름방학이 지나 새 학기가 시작되고 달포쯤 지난 어느 날의 하굣길, 여느 때처럼 학교 앞 점방[문방구]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고르고 있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빨간색 장난감 기타. 창밖을 향해 매달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서 나를 데려가 ‘라는 듯 애교 섞인 몸짓을 보낸다. 단숨에 장난감 기타의 유혹에 빠졌고, 기타는 이미 내 것이었다. 빨갛고 앙증맞은 기타를 집으로 어서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홉 살 꼬마가 사기엔 너무 비쌌다. 쫀드기나 사탕 정도를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으로는 넘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홉 살 인생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 빼앗긴 장난감이었다. 당장 살 수 없어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애가 탔다. 마음에서도 전쟁이 났다. 당장 ’ 엄마를 졸라서 사자‘와 ’ 그건 착하고 바른 행동이 아니야 ‘ 하는 맘이 번갈아 가며 나를 흔들었다. 결국 나는 착한 아이가 되기로 한다. 그렇다고 기타를 포기한 것은 아니고 내 힘으로 사겠다는 결심을 했다. 기타에 눈도장을 찍어 두고 몇 날 며칠을 학교를 오가며 기타가 그대로 있기를 빌었다. 얼마 남지 않은 추석까지만 팔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추석에 받은 용돈으로 기타를 사겠다는 계산이었다. 희망대로 추석이 지난 그 다음날, 기타는 내 것이 되었다. 추석 연휴라 학교가 쉬는 날이었지만,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다. 집에서 학교가 있는 마을까지는 어린 내 걸음으로 족히 30분은 걸어야 했다. 기타를 향한 발걸음은 꼬불거리고 울퉁불퉁한 흙길이 마냥 꽃길인 듯 가벼웠고, 입가는 실없는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기타는 나의 보물 1호가 되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가지고 놀던 기타도 몇 년이 지나니 조금 시들해졌다. 책꽂이 위에 올려줘 눈으로만 가지고 놀았지만 여전히 나의 보물 1호였다. 그러다 사단의 그날이 왔다. 초등5학년 늦가을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았는데 뭔가가 허전했다. 늘 놓여 있던 기타가 보이질 않았다. 이 방 저 방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엄마한테 “내 기타 못 봤어요?” 하고 물었다. 엄마는 너무도 간단히 답하셨다. 아빠 친구 아들이 와서 가지고 놀다가 갖고 싶다 해서 그 아이에게 줬다는 것이다. 너는 이제 그런 장난감 없어도 되는 나이지 않냐 고?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고, 동시에 큰소리로 소리쳤다. 왜 내 물건을 허락도 없이 엄마 마음대로 다른 아이에게 줬냐고. 다시 내 기타 찾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두 발을 버둥대며 울고 또 울었다. 막내로 자라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소리 지르고 생떼를 부리며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날 식구들도 적잖이 당황했었다 한다. 그만큼 기타에 쏟은 내 사랑이 컸고, 예고 없는 이별에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울다 지쳐 그대로 잠들었던 기억이다. 그 저녁 엄마는 아버지께 야단을 들으셨다 했다. 그렇게 기타와 이별을 했다. 기타를 가지고 간 아이는 옆 동네 사는 동생이었지만, 차마 다시 기타를 돌려 달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러면 안 될 거 같았다.

장난감 기타에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처음으로 내 돈을 모아서 산 물건이라 그랬지 싶다. 내 것이 되길 원했던 간절함의 시간들이 녹아 있었고, 보물 1호라는 의미와 애정이 있어 더욱 각별했던 것이다. 엄마의 그 결정에는 엄마와 아이가 분리되지 않았고, 엄마의 결정이 곧 아이의 결정이라 생각하셨지 싶다. 1980년대, 그 당시 우리 사회나 가정의 분위기는 대부분 부모가 결정을 하면 자식들은 대체로 따르는 그런 시대였다. 그날 엄마도 무척 당황하셨을 것이다. 다음날 엄마가 내게 사과하셨다. 어린애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만 아셨고, 막내딸은 다 자라 장난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단다. 내가 원하면 다시 돌려받아오겠다 했지만 난 그러지 말자고 했다. 엄마 말처럼 장난감 기타는 나보다 어린 그 아이에게 더 필요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도 내 보물 1호를 자기의 보물 1호로 만들어 소중하게 아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일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해도 언제든 내 손을 떠날 수 있다는 것과 어른인 엄마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엄마의 진심 어린 사과와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의 입장이 헤아려지며 속상했던 마음이 누그러졌었다. 그렇게 한 뼘 더 마음이 자랐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 우리 엄마와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봉제인형을 좋아한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천이 전하는 느낌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해서 아이들 어릴 때도 봉제인형을 많이 샀다. 그러니 아이들도 당연히 봉제인형을 좋아한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정도였지 싶다. 아이들 방에서 나뒹구는 인형들 정리가 쉽지 않았다. 내가 본 기준으로 평소 아이들이 애착을 갖고 노는 인형들을 제외하곤 '아름다운 가게'에 모두 기증을 했다. 그날 우리 집에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자기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인형들을 보냈냐고. 남겨두지 않은 인형들 중에 아이들에겐 의미가 남다른 인형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날의 일로 원망을 받고 있다. 나도 봉제인형을 장난감으로만 여겼다. 장난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아픈 기억을 잊고 우리 엄마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니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엔.


그 후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경계하며 살고 있다. 그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한 일이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그들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게 더 문제인 듯하다.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늘 사고의 유연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