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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예는 세계를 바꾸고 김건모는 내 이야기를 한다


지난해 8월, 한국의 밤은 칸예의 이름 아래 뜨거웠다. 그가 방문했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음악과 퍼포먼스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리스닝 파티로 채워질 것으로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을 그대로 뒤엎고 칸예가 3년만에 마이크를 잡았다. 150분 동안 78곡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아마 칸예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이런 구성의 공연은 처음이었을것이다. 마치 지난 20년 동안 형성한 히스토리가 고양종합운동장의 쌓인 흙 언덕에서 폭발하는 듯 했다. 공연을 지켜본 우리를 포함해 전세계 그의 추종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다만 그를 향한 이런 수많은 찬양 속에서도 아직 나에게만은 칸예는 너무나 멀다. 감히 그의 음악성과 예술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의 노래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거창한 메세지보다 내 이야기를 담긴 음악을 듣게 된다. 그래서 결국 김건모로 돌아온다.


김건모의 음악을 듣는 순간, 우리는 복잡한 해석을 요구받지 않는다. 그저 그의 목소리를 통해 지나온 날들의 추억과 감정을 되새길 수 있을 뿐이다.


칸예와 김건모를 비교하는 것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칸예는 미래지향적이고, 혁신적이며,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 그는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김건모의 음악은 그와 정반대에 있다. 김건모는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우리가 이미 지나온 시간 속에서 우리를 끌어안는다. 그의 노래는 우리가 겪은 감정과 경험을 공감하게 하고, 그 시절의 순수함과 아픔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김건모의 음악은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감정의 기록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물론, 이 둘 중 하나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예의 음악이 제시하는 혁신과 도전은 분명히 가치가 있다. 그는 현대 음악과 문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이며, 그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걸쳐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칸예의 음악이 여전히 거리감 있게 다가올 수 있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기보다는 김건모의 익숙한 멜로디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김건모의 음악은 우리 세대의 정서를 대변한다. 나는 그 노래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노래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칸예가 제시하는 미래의 비전을 존중하면서도, 나에게는 여전히 김건모의 음악이 더 큰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칸예보다는 김건모를 택하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김건모의 노래를 통해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저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두 명의 아티스트는 각기 다른 시대와 감성을 대표하지만, 그 둘의 음악은 나에게 다른 방식으로 깊이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김건모를 듣는다. 그것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는 작은 다짐이다. 칸예는 세계를 바꾸려 하지만, 김건모는 나의 마음을 지킨다. 이 두 아티스트의 음악은 내 삶 속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울리고, 웃게 만든다. 그리고 그 둘이 함께 존재할 때, 나는 비로소 완전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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