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우리

영화 리뷰

by 느린아이


네가 선풍기 너만 썼잖아. 치사하게.


끝끝내 불씨를 꺼뜨리는 바람은 생각보다 아주 작다.

태풍이 지나가도 버티던 것이 돌아앉으며 움직이는 공기에 꺼져버린다.


어린 날의 사랑, 시간이 흐른 뒤 마주치는 두 사람,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컬러와 흑백 화면.

진부한 플롯과 자칫 촌스러울 수 있을 연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장면이 촘촘했다. 과하지 않았고, 비틀거나 숨기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들이 가장 보편적인 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과 반드시 맞닿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했다. 보편성이 그저 평범하기만 하지 않도록 정성스레 박혀있는 사랑스럽고 가슴 아린 장치들 덕에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집중할 수 있었다. 특히 작 중 등장한 소품들을 기억해보며 리뷰(내용+결말 포함)를 작성해보고자 한다.


담배

어린 정원의 첫 등장은 짙은 스모키 화장과 팔뚝 안쪽으로 살짝 보이는 타투, 그리고 담배를 문 모습이었다. 이후 은호와 함께 담배를 물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때로는 눈물도 흘린다. 때때로 고달프지만 자유로운 그들의 청춘과 사랑을 잘 담는 소품이었다.

그러나 은호가 헤드셋을 쓰고, 돌아앉은 뒤로 담배는 오히려 두 사람의 단절을 보여준다. 정원과의 대화 대신 쌓여가는 담배꽁초, 나중에는 대화를 거부하듯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그저 물고만 있는 모습이다. 함께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그들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담배는 더이상 청춘의 상징이 아닌 퀴퀴해져만 가는 현실이 되었다.


커튼과 선풍기

햇살과 바람은 정원이 고시원을 떠나 은호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내어준 것들이다. 통창을 통해 내려앉는 햇살도 아니었고, 쾌적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도 아니었지만 정원과 은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던 것들. 그들의 찬란한 시간을 보여주는 내내 햇살은 따스했고 선풍기는 늘 정원을 향해 있었다.

10년이 훌쩍 넘게 지나 다시 정원을 만난 은호는 정말 다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고, 정원은 다 받았다고 말한다. 은호가 주고 싶었던 것과 정원이 받은 것은 다르지 않았을까? 다 해주고 싶었다던 은호는 커튼을 닫고, 정원에게서 선풍기를 돌렸다. 사랑을 지키는 것은 커다란 근사한 약속이나 찬란한 미래가 아니라 함께하는 순간 속 작은 배려라는 걸 기억할 수 있었다.


정장과 유니폼

꿈을 잠시 미뤄두고 뛰어든 현실. 둘은 자랑스럽지 않은 정장과 유니폼을 입고 각자의 일터로 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해맑은 웃음과 솔직한 눈물이 사라져가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아프게 와닿았다.

서로를 안쓰럽게 보던 것이 어느 순간 부끄러워진다. 한 때 같은 꿈을 꾸던, 잘나가는 친구들을 우연히 만난 뒤 정원에게 퇴근할 때 유니폼을 입지 말라며 무시당한다는 은호의 대사 뒤로는 정원이 부끄러운 마음보단 미안함과 죄책감이 보인다. 그 옷을 입게 한 자신이 한심한 마음을 담아낸 구교환 배우의 연기가 참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소파

영화에서 메인 소품으로 가져간 중고(?)소파. 언덕 위 옥탑에 살던 은호와 정원은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며 길가에 내놓아져있던 소파를 집으로 들인다. 꽤 크고 무거운 소파를 둘이 땀 뻘뻘 흘려가며 언덕 위로, 옥탑으로 가지고 올라간다. 안그래도 비좁은 옥탑에 커다랗게 자리한 소파는 마치 둘의 사랑을 눈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꿈을 잠시 내려놓고 고단한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정원은 그 소파 위에서 잠이 들고 은호는 정원의 까진 뒤꿈치에 약을 발라준다.

녹록치 않은 서울살이에 지쳐가던 둘은 결국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떠나온 반지하 방에 소파를 넣어보려다 포기하는 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딱 봐도 안되지 않냐는 은호와 혼자서라도 소파를 들여보려다 다치고 나서야 소파를 포기하는 정원의 모습이 마치 그들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는 듯했다.

그 장면을 보며 그들이 옥탑으로 소파를 옮길 때를 다시 떠올렸다. 영화에서는 둘이 소파를 수레에 싣고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만 보여주는데 사실 옥탑 계단을 오르고 좁은 문으로 소파를 집어넣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수레를 끌던 때의 그들이었다면 결국 반지하에 소파를 들이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혼자 소파를 들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는 사랑이 피고 지는 모습을 부끄러울 정도로 가까이 보여준다.

사랑이 지고 난 후에야 정원과 은호는 끝끝내 꿈을 이뤘다. 보육원 출신에 고시원에서 악착같이 서울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정원은 건축사가 되었고, 홀로 식당을 하시던 아버지 밑에서 꾸역꾸역 3수를 해가며 게임 개발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은호는 결국 잘 나가는 게임 개발자가 되었다. 너에게 가려져있던 나의 삶을 보아서이거나, 나를 미워하다 미워하게 된 너를 외면하다 놓친 지난 시간을 모면하고자이거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멈췄던 둘은 다시 꿈을 쫓았다. 정원의 말대로 지난 사랑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면 둘은 그 꿈을 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헤어진 이유, 꿈을 이루게 된 이유가 참 아프게 현실적이다.

이제는 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때로는 더 나은 선택이고 해피엔딩일 수 있다는 걸. '만약에...'라는 질문은 나도 사랑을 끝낼 때마다,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참 많이 하곤 한다. 하지만 지난 사랑에 계속 만약을 붙이다 보면 결국 지금의 내가 희미해지더라. 하지만 그 과정까지도 사랑이라 한다면 지금이 너무 흐려지기 전에 나만의 엔딩을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은호의 게임 엔딩을 보고 다시 지금의 색깔을 찾은 정원처럼, '만약에 우리...'라는 질문은 마음 한 켠에 넣어두고 고개를 들어보면 그 사랑이 힘껏 떠밀어주어 성장한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P.S. 함께 볼 만한 책- 『만약의 세계』, 요시타케 신스케 저

어떤 물건도 어떤 일도 어떤 사람도 어떤 마음도 사라지거나 없어지지는 않아.
매일의 세계에서 만약의 세계로
있는 곳이, 머무는 곳이 바뀔 뿐이야.
너의 미래가 될 뻔했던 모든 것이 거기에 있어.
『만약의 세계』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