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 냉전(冷戰)을 살다
합창단이든 오케스트라든 연주가 좋을 때, 하모니가 잘 이뤄졌다고 말한다. 합창단 구성을 보자, 일단 여성과 남성이 함께 같은 곡을 연주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소프라노, 알토로, 남성은 테너와 베이스로 이뤄져 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각 파트는 서로를 배려하면서 자신의 연주를 소화한다. 목소리가 큰 사람은 소리를 작게 하고, 작은 사람은 좀 더 힘을 낸다. 오케스트라는 더 복잡하다. 다양한 악기들이 함께 연주하는데, 합창단보다 구성이 복잡해서 더 세밀하게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연주한다.
이공계와 인문계의 조화도 한 곡을 연주하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와 같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조화는 한두 해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초등교육부터 시작해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이끌고 나가야 하며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당연히 안정감 있는 교육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통섭 : 인문학과 이공학이 만날 때
구가야 아키라(Akira Kugaya)의 『최고의 휴식』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쉽게 말하면 불교 명상과 같은 것이다))와 뇌 과학의 연결을 다뤘는데, 실제로 둘의 상관성을 연구한 논문들이 많다고 한다. 과거에는 명상과 뇌 과학의 연결성을 생각했던 학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러나 현재는 연결 가능함을 증명한다.
인문계와 이공계의 사고방식은 분명 다르지만,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본인이 하는 일에 따라 그 비중이 다를 뿐이다. 어떤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를 보자. 과학자였고, 예술가였고, 철학자이기도 했다. 통섭형 인간의 전형이다. 그가 회화에 적용한 원근법은 과학적인 소양 없이는 발견할 수 없는 기법이었다.
이공학이 뜬다고 해서 인문학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인간 소설가는 존재할 것이고, 현재는 철학이 과학 기술의 발달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뇌 과학자 디크 스왑(Dick Swaab)은 『우리는 우리 뇌다』에서 뇌 과학으로 모든 인간의 신비가 풀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저자의 주장은 크게 낯설지 않다. 모든 궁금증은 과학의 미래가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독일 본 대학 철학 교수 마르쿠스 가브리엘 (Markus Gabriel)은 『나는 뇌가 아니다』로 반격한다. 인간은 과학적으로 일일이 분석되는 기계가 아니라는 하면서 그 증거로 ‘자유’를 제시한다. 이런 과학과 철학의 논쟁은 이 시대에 필요한 과정이며, 인문학과 이공학이 하모니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만을 견지하고, 미래를 인문학에서 찾는 사람은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하는 것이다. 순수 인문학자라고 해서 현대 과학 문명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적절히 배워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게 합리적이다. 아울러 인문학자들이 강조하는 창의성도 둘의 조화를 통해 창출되는 것이지, 어느 한쪽만 월등하다고 해서 발휘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다양한 채널 – 책, 대중매체 등 –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노마드(Nomad) 일까?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정주(定住) 사회이다. 아시아권, 특히 농경사회를 기초로 한 국가는 대부분 ‘정착’이라는 단어에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 매년 명절만 되면, 길고 긴 고속도로가 수많은 자동차로 인해 주차장이 되는 현상이 매년 계속 나타나는 이유도 ‘정착’과 연관된 것이다. 또한, 부정적인 폐습이라 할망정 학연, 지연, 혈연을 따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착’이 아닌 ‘유목(遊牧)’을 말한다.
‘노마드(Nomad)’는 그리스어 nomos, 또는 nemo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목초지에서 풀을 뜯어 먹다’, ‘목초지에 데려가서 그곳에 풀어 놓다’라는 뜻이다. 디지털 노마드, 잡 노마드는 이직과 이동과 연관된 현대의 다양한 직업 형태와 근무환경을 토대로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러나 노마드는 한국 사회에 아직 뿌리 내리지 못했다.
사회의 어른으로 버티고 계신 우리 부모님 세대들에게 유목민은 ‘오랑캐’, 혹은 ‘역마살’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만 연상시킬 뿐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들에게도 ‘노마드’라는 용어는 ‘폼’나는 말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인 바람은 정착이나 안정이다.
최근 한 언론에서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중고생들이 희망하는 직업 1위가 10년 넘게 교사라고 한다. 이런 통계자료를 볼 때, 우리 사회는 노마드라는 용어 자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군둘라 엥리슈(Gundula Englisch)의 『잡 노마드 사회』에서는 “노마드는 공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사회적 그리고 감정적 이동을 포함하고, 새로운 경험과 사고의 지평선을 열고자 하는 욕구도 포함하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단순히 회사에 가지 않고 스마트 워크플레이스나 카페에서 ‘스마트 워크’(영어로는 ‘텔레워크(Telework))’를 한다고 해서 디지털 노마드를 실현하는 게 아니다. 물리적으로는 노마드를 실천 중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정주를 희망한다.
‘정착’이라는 언어는 구시대적 유물로 느껴지지만, 실상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새겨진 목적 지향적인 언어이다. 현실은 아르바이트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는 노마드 인생, 그래서 언젠가는 ‘정착’하고 싶은 바람, 현실과 이상의 모순이 두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노마드가 정착의 대안이 아니라 정착할 수 없어서 노마드 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래서 언어와 현실의 간격이 더 크게 느껴진다.
우리 일상에서는 불필요한 노마드가 충분하다. 집에서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학교에서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일진 역할을 하는 그룹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 또한 한순간의 연합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이제는 고립이다. 카페에 앉아서 경량화된 노트북을 켜고 있다고 해서 노마드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바람은 대체로 ‘정착’일 것이다.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노마드의 삶을 종결지을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현재를 버티는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은 앞으로도 한동안 정착이라는 안락함을 더 추구할 것이다.
이런 어쩔 수 없는 노마드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긍정적인 트렌드가 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노마드로 바뀌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냉전(冷戰)?
4차 산업혁명의 광풍 속에 부랴부랴 조성된 제1기 ‘대한민국 4차 산업혁명 위원회(현재 해체됐음)’는 미래를 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융합, 조화, 연결 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위원들의 구성을 보자. 25명 중 16명이 이공계 출신이고, 5명이 경제와 경영 전공이며, 남은 위원들의 전공도 외교학, 지리학, 행정학 등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원장(장병규)도 스타트업 관련 전문가여서 4차 산업혁명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정책을 제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시작도 조용했지만, 해체도 조용했다. 억지로 관련한 보도를 찾아야 알 수 있었다.
현 정부는 과거 정부 – 김대중, 노무현 정부 - 의 대북정책을 계승해서 포용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 정부가 그랬듯이 공식처럼 남북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휴전선 앞에서 ‘종전(終戰)’의 메시지를 정성스럽게 전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현시점의 모습은 냉전과 다를 바 없다.
21세기 첨단 시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20세기의 뜨거운 냉전 속을 동시에 살아간다. 이러한 시공간의 아이러니 속에서 새로운 산업혁명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대부분 국민은 무관심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소수는 상황과 판단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칠 것이다. 삶의 방식이야 자유이니 제재할 수 없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4차 산업혁명이든 대북 문제든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의 이념 논쟁이 미래의 발목을 꼭 쥐고 있는 형국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민주주의가 활성화될 거라는 부푼 기대가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그런 기대는 망상처럼 보인다. 오히려 ‘빅 브라더’와 ‘*리틀 피플’이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조정하는 우울한 디스토피아의 어두운 구름이, 금세라도 몰려와 폭우를 쏟아놓을 기세다.
* ‘리틀 피플’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Q84』에 등장하는 작은 괴물이다. 인간의 몸속에서 인간을 통제하고 조정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1984』에서 ‘빅 브라더’를 통한 감시와 통제를 우려했다면, 하루키는 ‘리틀 피플’을 창조해서 인간 내면의 통제와 조정까지 가능한 세상을 우려한다.
작가: 조연호, 편집: 안대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