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허상(사이비 존재)에서 벗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는데(필자는 시청하지 못했다), 작품의 외설적인 부분이 유독 강조되어서 작가가 실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는 모욕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쓴 책이 《불멸》이다. 본 작품을 읽어 본 다음에 읽어 볼 작품으로 추천한다.
작품은 4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굳이 주연 커플이라고 한다면, 토마시와 테레자일텐 데 둘 다 기독교를 연상시키는 이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인물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작가가 기독교의 무거움을 비판하기 위한 네이밍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하다. 우연한 계기에 만난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되고, 테레자가 토마시를 찾아와 동거하면서부터 사실혼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여자에게 얽매이기 싫어하는 토마시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자주 맺지만, 이상하게도 테레자에게 돌아온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둘은 ‘프라하의 봄’ 이후 도시에서 더는 살수 없어서 척박한 농촌 지역에서 머물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한 번뿐인 인생의 가벼움
무거움, 진리(신), 인과율 등 따위를 거부한다. 작품은 포스트모던을 지향하는 것일까? 그렇게 전제하고 읽는 게 편하다. 작품이 쓰여진 배경은 1960 – 70년대다. 작품에서 다루는 연인 관계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외설적으로 읽히고, 그런 평가를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외설스러움은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 전체를 아우르며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아니다. 굳이 한두 개의 키워드로 작품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더 다양한 소재가 작품 안에 얽히고섥혀 있다.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말은 쉽게 해석되지 않았다. 여러 번 읽고 나서 고심한 끝에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 뿐이다. 작가는 ‘존재’라는 단어를 꺼내 든다.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으로 시작하는, 그래서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는 니체를 벗어나면 현실적으로는 일회성에 갇혀있다. 흔히들 인생은 한 번뿐이어서 삶은 무겁고 진중한 것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반론을 펼친다.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이제 인간의 인생은 그림자와 같아진다. 무게가 없다. 그래서 존재는 가벼워진다. 그런데, ‘참을 수 없음’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존재의 참을 수 없음은 기존 존재의 무거움을 의미한다. 그 무거움이 진리처럼 여겨졌던 과거, 무거움은 종교였을 수도 있고,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 탱크의 묵직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고 나서 등장한 전체주의. 이런 무거움이 존재를 누르고 있었고, 이러한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작가는 신화적 인물의 등장을 거부한다. 가벼운 인간, 그 가벼움만 가지고도 존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다.
결혼과 섹스
토마시가 말한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 내가 여자와 관계를 맺은 지 거의 이십오 년이 넘었어. 200을 25로 나눠 봐. 매년 새 여자가 여덟 명쯤 있었던 셈이지. 그리 많은 건 아니잖아.”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그러나, 인물은 그리 많은 게 아니라고 한다. 결혼했었다. 그러나 이혼했고, 아들의 양육도 포기해서 부정이라고할 만한 것도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서 여자를 만났고, 섹스를 했다.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는 세계에서 200명의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속 주인공은 섹스에 탐닉하는 남자로 그려졌을 것이다. 시대를 옮겨서 지금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부분은 아니다. 그래도 200명은 좀 많다. 지금도 자칫 잘못하면 여성 비하적 발언, 가부장적 작태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30 – 40년 전이다. 아무리 개방적인 서구라고 할지라도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섹스에 무거운 방점을 찍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적인 올가미로 여긴 결혼제도를 무거움으로 치환시킨다. 이윽고 무거운 바윗돌을 밀어낸 주인공은 가벼움을 즐긴다. 200명의 여자를 만났다는 점을 단순 수치로만 따지면, 윤리적이지 못해 보인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언어를 지우고, 일부일처제를 치우고 나면 200명과의 섹스는 ‘에로틱한 우정’이 될 수도 있다. 토마시는 가벼움을 즐긴 것이다. 책임지지 못할 결혼에서 나와서 그는 책임질 필요 없는 단순 관계에 몰입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200명과의 만남은 쉽게 용납되지 않을 듯하다. 남녀관계, 특히 그들의 성행위,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가 만나 쾌락의 비명을 터트리는 장면은 상상 속에서만, 혹은 야동 속에서만 봐야 허락되는 것이니까.
오이디푸스의 선택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할 거라는 저주의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는 버림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결국 예언대로 모든 걸 실현한다. 그 예언을 알게 된, 그래서 자기의 아내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안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방랑자가 된다. 작품 속 오이디푸스는 원치 않은 잘못을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인공 토마시는 이러한 내용의 2,000자 글을 썼고, 후에 이 글은 그를 옭아맨다. 이미 던져진 글을 포기하라는 불합리함에 굴복하지 않고,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유리창 닦이를 택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사상을 집요하게 번복하라고 협박하면서 회유하는 비밀경찰과 이런 사람의 사상에 기대어 비밀리 활동하는 사람들의 동조한다는 빈 란에 서명하라는 요청, 토마시는 둘 다 거부한다. 하나는 변절이라는 비판은 받을테지만, 다시 안락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사상을 유지하면서 비밀 결사대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다른 말로, 애국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 독자들 머릿속에는 둘 중의 하나가 떠올랐을 테지만, 작가는 새로운 제3의 선택을 했다. 회유도 거절하고 동조 서명란에 사인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선택은 장님이 되는 것이었다. 본인이 원하지 않은 운명에 대해서도 책임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신을 원망하며 살거나, 친부모를 죽음에 몰고 간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자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택하지 않았고, 온전한 삶을 택하지도 않았다. 제3의 선택을 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가지 ‘예’, ‘아니오’라는 선택지의 암묵적 강요에 새로운 선택지 ‘잘 모름’을 추가한 것이다. 당시 체코는 소련의 비밀경찰이 활개 치고 다녔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하는 사상 검증이 이뤄졌던 시기다. 어쩌면 제3의 답도 반동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반동보다는 가볍다. 토마시는 다시 한번 존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가벼움을 택한 것이다.
신기루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필자의 대학교 시절이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한 교회 누나가 “저는 니체를 읽지 못하겠어요. 그의 사상에 휘둘리면 안 되니까.”라고 말했다. 그 시절 니체를 읽고 있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나는 니체를 읽어도 휘둘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아마 그 누나는 여전히 니체를 읽지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시끄럽다. 윤석열이라는 사이비 존재의 무거움으로 인해서 양갈래로 따진 머리처럼 국론이 분열되어 쓸데없이 힘을 소진하고 있다. 보수도 진보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에서 존재의 무거움은 필요 없다. 솔직히 제3의 답을 찾기도 어렵다. 서구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인해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양차 대전으로 1억 명이 죽어야 했고, 이후에는 공산주의라는 극단적 무거움 속에서 수천만 명이 죽어야 했다. 그러다가 어렵게 제3의 길을 언급하긴 했으나, 결론은 다시 무거움을 택하며, 문을 걸어 잠근다.
대한민국은 그런 역사적 걸음을 걷기도 전에, 즉 무거움을 경험하기 전에 가벼움이 판쳤다. 그래서 무거움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가벼움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현재 2030세대의 가벼움은 그들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70대 이상의 가벼움은 그들의 근육량이 준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드러나는 행태들이다. 사상은 가볍지 않다. 아무리 가벼워 지라고 해도 사상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죽지는 못해도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처럼 말이다. 사이비 무거움은 우리가 밀어내야 할 무거움이 아니라, 신기루 같은 허상이기에 빨리 정신을 차려서 허상을 지워버려야 한다. 목마름으로 인한 신기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을 마셔야 한다. 허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제대로 볼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사이비 종교가 무서운 이유는 종교가 아닌 것이 종교의 흉내를 내면서 교리를 편리하게 바꾸기 때문이다. 사이비 보수, 사이비 진보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사이비 보수의 허상에 속아 내가 보수라고 여기고, 혹은 진보라고 착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3의 길은 둘 다 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를 심판할 수 있다. 그러나 도처에 걸린 현수막, 국민의 소중한 권리라는 선전문구로 인해서 심판하려는 용기가 크게 위축된다. 정말 답이 없는 것일까?
또 한 번의 장미 대선
참을 수 없는 선거의 가벼움,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선거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는 의미다. 선거는 무거워야 한다. 그런데, 선거가 너무 가벼워졌다. 선택 장애에 빠져야 하는 시점인데, 여전히 유권자는 쉽게 선택한다.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려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으로 그냥 돌아오곤 하는데, 왜 선거는 꼭 하려는 것일까? 사전투표라는 악랄한 제도까지 만들어서 투표를 독려하는 이유는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정치 엘리트들의 유치한 계략임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대통령제도에서 대통령 당선은 독이든 성배를 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독주를 기꺼이 마시기 위해서는 현대판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걸까? 투표가 가벼워지고, 선거가 가벼워 진다. 존재의 가벼움은 우리가 하나의 선택지로 남겨둘 수 있지만, 투표와 선거의 가벼움은 지양해야 한다. 가벼운 인물밖에 없다면, 그들이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를 닮지 못한다면, 혹은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비 무거움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허상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선택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허상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빠져 나오지 못하는 한, 존재의 무거움조차 느겨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