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4차 산업혁명과 지역 사회(5)

공평해진 세상?

by 조작가Join

몇 년 전에 대구 경신고등학교에서 수학능력 평가 만점자가 4명이 배출됐다. 전국 최다 수였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니 만점을 받은 학생들에게 당연히 축하해줘야 한다.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 역시, 좋은 일이다. 그리고 좋은 교육(?)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학교 교육만으로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앞서서 지방에도 나름의 8학군이 있다고 했다. 대구에는 강남 8학군에 필적하는 수성구가 있다. 특히, 수성구는 ‘지방의 대치동’, ‘대구 8학군’ 등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수성구 일대를 지나다 보면, 학원 일색이다. 어느 도시나 학생들의 학업을 보충해줄 학원들이 있는 게 당연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그렇게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괜히 세계 최고의 사교육비 국가가 되는 게 아니다.

학교는 거주지에 따라 입학할 수 있지만, 좋은 학원은 시험을 치러서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한 학생이 합격하면 그 주변 학생들의 부모가 전화해서 노하우를 문의한다.

그렇다면 왜 사교육 시장이 커지고, 왜 아이들을 학원에 못 보내서 난리인가? 원인은 일류 대학에 있다.

먼저, 국가가 책임지는 의무교육에 대해 살펴보자.


“대한민국을 비롯해 많은 다른 나라들은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현재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나라가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교육을 무료로 받게 되다 보니 국가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교육 범위가 넓어지고 결국 나라를 위한 인재들이 생겨날 확률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인재가 늘어나 각 나라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한다면 그 나라가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위키피디아』(밑줄은 필자 강조)


위의 내용을 참고하면, 의무교육의 목적은 국가를 위한 인재 육성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인재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어떤 인재를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때, 인재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국민을 일컫는 것이며, 교육의 목적은 올바른 국민, 혹은 올바른 시민 의식을 갖춘 인재 육성에 있다고 하겠다.


현실에 대응하기 어려운 교육


좋은 중학교의 기준은 특수 목적 고등학교 입학 학생 수로 평가되고, 좋은 고등학교의 기준도 일류 대학과 의예과에 얼마나 많은 학생을 보내는가에 달려 있다.


‘교육의 목적은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대부분 동의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일류 대학에 가려고 하는 학생이나 부모의 욕정은 21세기 전에는 세상을 괜찮게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즉, 좋은 대학에 가서 졸업하면, 좋은 직장, 신분 상승 등의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도 않다.


타일러 코웬의 다른 책 『4차 산업혁명, 강력한 인간의 시대』에서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많은 직장이 구글과 같은 형태로 바뀌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등급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퇴출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실력이 없으면, 쫓겨난다는 의미다. 조금 더 살펴보자.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에서는 “지금 어린 세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격려를 받으면서 성장한 특별한 세대인 줄 알고 성장해 자존감이 높은 세대지만, 결론적으로는 냉혹한 세상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어린 시절의 특별했던 지위를 내려놓게 된다”라고 말한다. 즉,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면, 네 인생이 좋아져!”라는 부모 시대의 기준이 통하지 않아서 자녀 세대들이 좌절한다는 말이다.

덧붙여서 “경제 교육의 효과에 관해 실시한 201가지 연구의 결과를 메타 분석한 결과, 경제 교육이 거의 효과가 없다고 밝혀졌다”라고 하면서 충격을 더 가한다. 10여 년 동안 배운 교육이 실전에서 아무 소용 없다는 의미다.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은 『늦어서 고마워』에서 “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한다고 해도 앞으로 30년간 일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쌓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하는데 “나는 대학을 졸업했을 때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자리를 ‘발명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세대와 자녀 세대를 구별하고 있다.


국내 사례도 하나 살펴보자. 공평한 대한민국을 꿈꾸며, 1998년에 “학벌 없는 사회”라는 시민단체가 조성됐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사회에 내재한 학력 차별의 심각함을 증거 하는 상징적인 좌표였다. 그런데, 2016년 자진 해산하고 만다. 왜? 좋은 대학을 나와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부르짖으면서 출범했던 시민단체가 학벌도 소용없는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해산한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구조가 SKY 중심으로 편성되는 부조리함에 불만을 품고 등장했지만, 이제는 학벌도 의미 없는 사회가 됐으니 해산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달성하고자 했던 공평함이 원치 않게 달성된 것이다.


과거를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열공’하는 자녀에게 주마가편(走馬加鞭)하는 부모


세상은 달라졌다. 다만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 세대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부모의 가치관 속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자녀들 역시 학교와 사교육 숲에서 길을 헤매면서 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류 대학 + α’에 목을 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목을 매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교육 시장은 수그러들지 않고 늘어나고 있을까? 좋은 대학을 나와도 제대로 취업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 왜 많은 자원을 투여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할까?


우선, 부모들의 인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이 교육받았던 기준을 자녀들에게 적용한다. 특히, 지역 사회는 더 심각하다.

실제로 필자 또래의 학부모들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자신들이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을 기준 – 일류 대학 입학, 혹은 서울권 대학 입학 - 으로 자녀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과거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서 자녀들에게 진보한 교육 과정을 제공해야 하는데, 오히려 과거의 우등생 – 일류 대학에 입학한 동기 –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자녀들을 주마가편(走馬加鞭)하는 꼴이었다. 과거를 통해 아이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 인식하고 있는 학부모들은 별로 없었다. 본인의 대학 콤플렉스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을 4차 산업으로 이해하는 부모도 허다했고,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본인이 사용하는 5G 스마트폰의 5G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기본적으로 자녀 교육을 계획한다고 한다면, 미래 사회에 어떤 직업이 유망하고 새롭게 생길지 알아봐야 한다. 동시에 지금까지는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사라질 직업에 대해서도 개략적으로 학습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학부모는 만날 수 없었다.


참고로 ‘잡코리아’에서 취준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사라질 직업은 대부분 단순 업무와 관련된 것이며, 우리 세대 부모들이 선호하는 흔히 말하는 ‘사’자 붙는 직업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살아남을 직업은 어떤 종류일까? 다소 추상적이지만, 창의력과 관련한 직업들이다. 그래서 자녀들의 창의력 계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사교육 시장은 온통 ‘창의력’으로 도배됐다.

기존 커리큘럼과 다를 바 없는데도 겉만 조금 바꿔서 4차 산업혁명이나 창의력 계발과 관련 있는 것처럼 홍보한다. 이런 거짓 창의력 교육에 대해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에서는 “현재 강조하고 있는 창의력도 성장 일색의 방법론이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교육이 아니다.”라고 일침을 놓고, “21세기 교육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함”을 강조한다.


과거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녀들의 미래까지 담보 잡는 현재 교육 현실을 제대로 아는 학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또한, 사설학원의 조삼모사(朝三暮四) 같은 전략을 제대로 파악해서 넘어가지 않는 학부모는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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