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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혁 Apr 10. 2022

시간에 대한

 누구에게나 '인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명사들이 있다. 그 대상은 맛집일 수도, 여행지일 수도, 게임의 챔피언일 수도, 책일 수도 있다. 나에게 '인생 영화'는 어바웃 타임이다. 영원회귀의 문학적 서사라는 점뿐만 아니라, 영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너무 화려하지 않은 잔잔함이 내 삶에 공명한다. 그 울림은 매번 다른 소리로 들렸기에, 질리지 않고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수식어를 담기엔 부담스럽지만 내 감정에 큰 파도를 일으킨 여러 작품들이 있다. 나는 '너의 이름은'을 보고 울었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연애를 해본 적 없는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와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거의 오열하면서 봤고, 요즘 읽는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도 책장을 찬찬히 아끼며 넘기고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시간적 측면에서 직선적이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어바웃 타임'에서는 주인공 집안의 남자들만 자기 삶의 시간을 되감고 재생한다. 반대로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모두가 '승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세계에서, 사고로 승각을 잃게 되어  세계의 가능성만이 남은 인물을 조명한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인물들이 뒤틀린 시간축에서 마주치고 엇갈리고,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두 주인공의 시간축을 반대방향으로 엮어 5년 주기의 루프를 형성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한 사람의 시간축을 잘라 끌어당겨와 루프를 만들어낸다. '그 시절'에서는 달을 보며 주인공들이 통화하는 대화와, 결혼식에서 교차되어 나오는 평행세계의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평행 세계'.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이 어떤 가능성의 발현이라는 점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운명과 우연을 꿰는 바느질과 같다. 지금이라는 경우의 수를 과거의 어떤 선택들과 임의적 우연의 산물로 존재한다고 바라보는 관점과, 과거의 모든 과정들은 지금이라는 필연적 운명을 향해 치밀하게 설계된 톱니바퀴라고 바라보는 두 관점의 차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시간의 축에서 오비탈적 가능성을 인식하는 순간, 내가 살아가는 '지금'이 가능성의 발현 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자명하다.


 '내가 맘먹고 공부했으면 그 과목 무조건 A 받지'라고 말하던 동기가 있었다. 그 동기를 통해 배운 점은, 노력까지도 능력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이해력, 집중력, 기억력이 아무리 뒷받침되어도 노력이 선결되지 않는다면, 성적의 측면에서 그 능력들은 아무 결과 없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곧, 가능성은 아무것도 없음을 포장하는 말이고 아무것도 없음을 위로하는 말이 가능성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삶을 가능성의 영역에서 존재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무엇일까. 선택행동이다. 선택은 운명의 척도이고, 행동은 신념의 표출이다.


 지금보다 어릴 때 나는 운명이라는 단어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생기곤 했다. 삶의 주체로서 마지막 근거인 자율성마저 박탈당해 발가벗겨지는 폭력을 암시하는 단어로 느껴졌다. 하지만 젠가부터 운명이라는 연극의 각본에서  내용 전부는 쓰지 못하더라도, 내 대사와 지문에 대해서는 선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 삶을 자연스럽게 다음 장으로 인도하고,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대한 운명의 예측 강제력을 지닌다. 하지만 이 운명의 폭력성에 저항하고자 하는 나는,  강제성에 대해 자율성이라는 갑옷을 입고 예측을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하지만 운명의 각본에는 강제성을 벗어나려 하는 나의 갑옷의 짜임과 몸부림의 순서까지 이미 적혀있다. 예측을 예측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운명이라는 필연성 앞에 모든 주체는 꼭두각시로 전락듯하다.


 하지만 배역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극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나의 행동과 대사다. 운명이 내 예측을 예측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 삶의 '면'적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의 '점'을 향해 존재하게 하는 근거는 내 행동이다. 그게 운명에 순응하는 방식이든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든 상관없이 확률을 존재로 탈바꿈하는 계기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나는, 극의 등장인물인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운명이 내미는 손을 잡을 것인가, 그 손을 비틀고 뿌리칠 것인가.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저 선택하고 행동하면 극은 계속된다.


 어쩌면 예전의 나도 그런 작품들을 보며, 우리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미래를 어렴풋이 인식한 게 아닐까. 그래서 지금의 매일처럼, 그때의 나도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새 울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의 내 눈물의 이유가, 어디선가 우리가 아직도 행복하게 만나고 있을 또 다른 세계가 '지금'이 아님에 대한 아쉬움 일지 모른다. 언젠가 악몽을 꾸고 너에게 울면서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그 꿈속에서 너는 나를 완전히 잊고 표정 없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 있었다.


  어쨌든 지금 내가 이별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의 연속상에서 과거의 내가 다른 언행과 선택을 했었더라도, '지금'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운명의 계획대로라고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연극의 다음 장을 향해 행동해야 한다.


 운명이 어떤 결말을 그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역할을 선택하려 한다. 언제까지 이 역할에 충실하도록 각본이 쓰여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해야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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