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 공부방에서 '방정식'의 개념을 배우고, x와 y를 만났을 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상을 수학이라는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물론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선택하면서 수학이란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복잡하지만 명료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학에서 수식이 문법의 역할이라면, 숫자는 언어다. 개념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대명사적 언어. 자연수, 0, 음수, 소수, 분수, 허수 등 숫자의 언어는 다양한 카테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수를 나누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나는 자연수를 내 나름 공정하게 나눠보려 한다. 홀, 짝이다.
홀수에는 왠지 모르게 모자라거나 넘친다는 느낌이 있다. 짝수는 딱 맞는 것이 어딘가 인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홀에도 짝에도 편애는 없다. 홀이라서 좋고, 짝이라서 좋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 어색한 단어가 떠올랐다.
'짝사랑'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짝을 이뤄야 하기에 '짝사랑'이라는 단어는 구조적으로 흠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반적인 '짝'의 의미와 반대로, 짝사랑은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의미상으로는 오히려 '짝이 없어 혼자뿐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홀'을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홀사랑'
단어가 너무 맛이 없다. 짝사랑이라는 단어에서는 아련함과 풋풋함의 향기가 떠오르지만, 홀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추운 겨울 잎이 다 진 나뭇가지가 바람에 휘청이는 쓸쓸한 추위가 느껴진다. 안 쓰던 단어라 입에 안 붙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짝사랑의 경험은 있지 않는가? 꺄르르 웃던 초등학생 때에도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이성친구 한 명쯤은 있을 테고,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지만 누군가를 좋아했던 순수했던 감정은 희미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연애의 경험은 짝사랑과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짝사랑은 '나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감정상태라고 한다면, 연애는 '나와 상대는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다'라는 증표다. 이 관계의 증표는 서로에 대한 의무감을 정당화한다. 연인이니까, 더 자주 연락하고 싶고, 더 자주 만나고 싶고, 맛있는 음식도 같이 먹고 싶고, 그냥 같이 있고 싶고 따위의 요구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연인이라도, 퇴근하면 혼자 쉴 시간이 필요하고, 주말에는 미룬 잠을 채우고 싶고, 방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며 넷플릭스 보고 싶고,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자유를 느끼고 싶을지 모른다.
이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지속적인 노력 자체가 연애의 과정이다. 타협할 수 있는 범위와, 타협이 불가능한 범위에 대해서 공통감을 갖고 나아가는 과정이다. 서로에게 부과되는 의무감을 입증하고, 부담되지 않게 하기 위한 협상은 다투고 화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는 존재론적 질문의 정수는 '연애'라고 생각한다.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마무시하게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나와 끊임없이 변하는 상대 사이에서 끊어지지 않는 어떠한 결속을 찾고 유지하는 방법.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며 상대의 존재를 사랑하고, 상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그 변화를 수용한 나의 변화를 소화하는, 그리고 그 변화한 나를 상대에게 납득시키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
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반복적인 붕괴, 재정립과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구성을 재구축하며 그 시점에 가장 적절한 사랑이라는 관계, 결속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연애다.
시시각각의 경험과 행동 속에서 나의 존재에 대한 연속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과거와 달라진 새로운 나를 긍정하며, 지속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즉, 연애의 조건으로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두 갈래의 사랑으로 구분된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인 만큼, 변화하는 나에 대한 수용과 정체성의 유지가 필수적이다. '나는 상대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짝사랑'이라고 한다면, '상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홀사랑'으로 표현하려 한다.
'짝사랑'에는 사랑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각각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짝'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홀사랑'에는 사랑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홀로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홀'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이 짝사랑과 홀사랑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연애의 조건을 달성할 수 있다. 만들어진 사랑의 비율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또 적절하게 기능하는 사랑의 배합비도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짝수와 홀수가 모두 합쳐져야 자연수를 이루듯, 짝사랑과 홀사랑의 올바른 균형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지하게 한다.
일이나 사회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연인들의 경우 짝사랑이 홀사랑보다 높은 비율로 배합되어 만들어진 감정이 적절히 작용하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고, 과거 중매나 집안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싹트는 사랑은 짝사랑보다 홀사랑의 비율이 높게 해서 만들어졌으나 적절히 작용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시작은 짝사랑의 크기에 좌우되는 바가 크지만, 그 유지는 홀사랑의 크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관계의 증표로서 연애나 결혼은 의무감을 부여하고, 이는 홀사랑의 최소치에 대한 제약을 걸어둔다.
짝사랑의 크기가 무한하다면 매일이 새롭고 설렐 수 있으나,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일시적으로 짝사랑의 감정이 쪼그라들었을 때에도, 증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소한의 홀사랑을 통해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부모님께서 자주 싸우고 다투셔도 잘 지내시는 건, '정'이라고도 부르는 이 홀사랑 덕분인 듯하다).
다만 어느 순간 이 홀사랑의 존재에, 당위성과 의무성의 제약에 부당함과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권태기가 여기에 속하지 않나 싶다. 일시적으로든, 지속적으로든 짝사랑의 감정이 줄어들어 홀사랑의 비율이 높아진 사랑을 가지게 되고, 그 배합비가 적절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시점이 권태기라고 생각한다. 이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홀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당사자의 노력뿐만 아니라, 줄어든 짝사랑을 다시 키울 수 있게끔 하는 상대방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연애 경험이라고는 딱 한 번 뿐이라 적은 내용들을 전부 확신할 수는 없다. 감정이라는 게 늘 그렇듯 밤하늘에 이는 바람처럼 올 때가 되면 오고, 갈 때가 되면 가지 않는가. 오늘 밤도 달은 밝고, 내일 아침도 해는 따뜻하듯, 불어오는 내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자고 생각한다. 오늘도 찌질의 역사를 기록하며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