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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혁 May 15. 2022

부담 걷기, 산책

 일상을 '바쁘다'라는 수식어로 꾸미는 게 익숙해진다. 창밖에는 바람이 잔잔히 불며 초록빛 풀내음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사무실 내 자리에는 한숨만 조각조각 내려앉는다. 바닥에 깔린 한숨들이 발목을 잡아끄는 늪처럼 느껴진 5월의 어느 날, 이 녀석들을 털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계기나 상황보다 '여유' 자체가 필요했고, 거창할 것 없이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했다.


 주말이면 따뜻한 물에 더 천천히 씻고, 간단한 밥 한 끼도 꼭꼭 씹어먹었다. 노래를 틀어놓기만 하지 않고, 가사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웃기도 했다. 퇴근한 후에는 편한 옷과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어디로 갈지 얼마나 걸을지 정해놓지 않고, 길이 난대로 걸음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봄은 어딜 가나 싱그럽게 웃고 있었고, 밤에도 어디 숨지 않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주고 있었다.


 이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걸음을 목적으로 하는 산책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정해놓은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고, 약속한 시간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보챔도 없었다. 누군가를 따라가야 한다는 조바심과 누군가를 앞질러야 한다는 경쟁도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공기와 둥둥거리는 이어폰의 노랫소리뿐이었다.


 그렇게 그저 걷다 보면 출발할 때 켜놓았던 어플에서 알림이 나온다.

"운동거리 1km, 운동속도 시간당 몇 km..."

3km 달리기를 할 때 자주 들었던 알림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머리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속도에 이 거리면, 어느 정도지? 행군할 때는 군장을 메고 시간당 4~5km를 목표로 갔는데... 메고 있는 짐도 없고, 더 편한 신발과 더 깔끔한 길이기도 하니까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습관이 무섭다는 걸 느꼈다. 얼마나 나는 쫓기고 쫓으며 지냈던 걸까. 생각을 다잡았다.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천천히 걸어가자. 더 멀리 갈 수 있지만,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자.' 그렇게 되뇌고 나자, 후련해졌다. 나에게 필요한 여유는 이런 종류였다. 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더 바랄 수 있지만, 바라지 않는 것. 순간순간을 수단으로 느끼지 않고, 매 상황을 충분히 음미하고 즐기는 것. 행복이 오지 않음을 탓하지 않고, 지금이 주는 행복을 작게나마 기다리는 것.


사랑을 대할 때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다고 100%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천천히 내어줄 수 있는 여유가, 예전의 나에게는 부족했던 것 같다. 이제는 잠깐 연락이 없음에 발을 동동 구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사랑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찌질함보다는 성숙함이 어울리는 연애가 하고 싶다. 


역설적으로, 여유를 찾으려고 더 부지런해졌다. 급하게 쫓길 땐 몰랐던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하루가 더 가득해졌다. 기다림과 여유의 크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비례하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되었다. 바삐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만큼, 부릴 수 있는 여유를 넓히려 노력하고 있다. 오늘 저녁의 내가 산책길을 걷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담을 여유로 가볍게 걷어내며 편히 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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