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해보는 것이 낫다.
1. 커뮤니티가 없는데 케어는 누가 하나?
커뮤니티 케어라는 용어가 나온 지 3년쯤 되는 듯싶다. 영국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박능후 장관의 등장 이후 새롭게 개념화되고 있다. 실제 노인복지 영역에서 건강보험 재정을 줄이기 위해서 전달체계 개편을 논의하면서 나온 개념이 커뮤니티 케어다. 그런데 장애운동 진영 등 '탈시설'과 '자립생활'이 화두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장애인의 탈시설을 채택하면서, 이를 실현할 개념으로 '커뮤니티 케어'를 결합시켰다.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인복지 영역의 기존 서비스 전달체계를 개편하는 고민에서 커뮤니티 케어가 언급되었는데, 문제는 장애인으로 확장하면서 발생한다. 왜? 장애인에게 있어서는 '커뮤니티'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인 영역은 얼마나 많겠나 싶지만, 장애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
장애인의 탈시설을 주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지역사회가 준비 여부이다. 지역사회가 준비되어 어 있으려면 장애인에 대한 다양한 사회서비스,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갈 곳, 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 등이 필요하다.
약간 원론으로 들어가면 커뮤니티란 무엇일까? 동네, 마을로 불리는데, 서울, 수도권과 같은 지역에서는 대부분 마을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은 아닌지 싶다. 도시화, 신자유주의 이후 재개발 열풍은 대부분 지역사회 공동체를 파괴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커뮤니티는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결국 장애인 영역에서는 커뮤니티가 없는 케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주체가 없는 케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2. 케어가 아닌 서포트로서 커뮤니티는 없는가?
케어는 우리말로 돌봄. 어떤 교수님은 케어가 우리말로 표현하는 돌봄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개념은 돌봄이다. 돌봄의 의미는 수동적이다. 누군가 제공하고, 그것을 당사자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돌봄의 수혜자는 혼자서 무언가를 하기 힘든 약자다.
그럼 장애인은? 장애 대상은 전연령에 해당된다. 우리 사회 장애인은 누군가로부터 의존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살아가는 주체자로서 인식보다, 여전히 가족 혹은 전문가들의 지원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막말로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다. 이런 인식을 바꾸는 것이 자립생활 모델이다. 당사자의 주체성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 주체성을 발현하기 위해서 그를 지원해야 한다가 자립생활모델의 뼈대다.
커뮤니티 케어는 주체와 행위를 결합한 말이다. 지역사회가 누군가를 돌본다는 말인데, 장애의 경우 자립생활활 모델은 돌봄의 개념과 충돌된다. 그래서 어떤 교수는 '케어'보다 '서포트'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한다. 나도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어떤 장애인이 지역사회를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원들을 어떻게 제공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닌지 싶다.
3. 사회복지 영역은 커뮤니티에 대해 환상을 갖는 것은 아닌가?
다시 원론으로 돌아오면, 커뮤니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사회복지는 지역사회복지론에서 지역사회의 개념을 배운다. 내가 배운 것에서 결론은 지역사회는 하나의 웅덩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회복지 영역은 지역사회가 매우 중요하고,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복지가 핵심이다. 어떤 대상이든, 자신만의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지관 등은 한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중심으로 서비스 및 어떤 지원들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들을 진행한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는 그럴까라는 의문이 있다. 나도 사업계획서를 쓰는데, 맨날 지역사의 지원, 변화를 무슨 레퍼토리처럼 떠든다. 그런데 과연 나는 지역사회를 염두하고 사업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는가? 그리고 나는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지역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등...
앞서 언급하였지만, 우린 지역사회에서 네트워크를 구성하면서 살아가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인천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그런 개념이 희박하다. 농어촌, 중소도시의 경우는 또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에만 국한하면 동네 주민들과 어떤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자발적인 활동을 하진 않는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지역사회가 누군가를 지원하고, 돌봐주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허상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어쩜 우린 커뮤니티라는 환상을 갖고, 머릿속에서 지역사회라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를 거기에 집어넣어서 사고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4. (지역)사회를 바꾸려는 운동성이 없는 커뮤니티는 박물관이 아닌가?
노인과 아동, 청소년, 여성, 장애인 등 영역마다 그 나름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나름의 문화, 가치, 철학 등이 작동한다. 그런데 장애와 관련한 영역은 다른 것과 다른 특수성이 하나 더 있는 듯하다. 바로 지역사회에서 배제의 역사가 꽤 길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가까운 주민센터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경우 대부분 장애인을 포함하는 경우는 드물다. 장애인을 별도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려고 하지, 비장애인 중심의 동아리 등에서 장애인을 포함하려는 노력, 인식 등은 부재하다.
결국 장애 영역은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노력이 함께 병행되지 않으면, 장애인은 동정과 시혜의 관점에서만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이 관점의 문제는 당사자를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인격체보다는 누군가 제공하는 것들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애 영역은 단순히 서비스 전달체계를 만드는 것과 더불어,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 제도의 변화를 동반한다. 그 과정은 당연히 저항이 따른다. 특수학교나 장애인복지관 등 장애와 관련한 시설물 반대가 대표적인 예다.
다시 커뮤니티 케어로 돌아오면, 이 개념은 당연히 운동성을 담보하여야 한다. 우린 장애와 관련하여 빈자리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빈자리를 매우는 것은 다수의 동의가 있으면 쉽게 이루어지지만, 실제 다수의 동의는 만만치 않다. 그럼 장애인의 커뮤니티 케어는 사회와 인식의 변화를 전제되지 않고 진행된다면, 장애인의 경우 지역사회를 시설에 갇히는 것은 아닌지? 박물관의 물건처럼 전시되는 것은 아닌지? 운동성이 없는 커뮤니티는 우리 머릿속에서 박물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5. 노인 영역과 장애영역은 엄연히 다른데, 여전히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커뮤니티케어를 적용하는 것은 아닌가?
노인과 장애인은 우리 사회에서 지위가 다르다. 그냥 다른 것을 넘어서 수직적이다.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재산(소득)이 있고, 이성애자이면서, 단란한 가족을 구성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으뜸일 것이다. 여기서 조금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진다. 장애인은 (주관적이지만) 여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집단은 아닌가 싶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노인은 위 기준에서 조금 벗어난 집단이다. 물론 노인 집단 내부를 보면 복잡 다단하겠지만.
노인 복지에 적용되는 것들을 장애 복지에 적용하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지역사회 기반의 차이다. 다수의 노인은 지역사회의 시설을 이용하는데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만, 배제되지는 않는다. 반면 장애인은 지역사회 시설물의 대부분 이용하는데 불편을 넘어서,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시민권의 차이가 있다. 노인의 경우 스스로 재산을 갖고, 자기결정권을 갖으며, 지역사회에 내에서 자신만의 발언권을 갖는다. 최소한 주민센터에 가서 자신의 부당함을 항의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경우 노인과 달리 자신만의 재산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자기결정권은 있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특히 자신만의 발언권을 독립적으로 갖는 경우는 드물다.
노인의 커뮤니티 케어는 전달체계를 조정하고, 지역사회의 자원을 조정하는 것으로 가능할 수 있다. 노인의 문제는 지역사회가 예민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니까 가능하다. (글로 이렇게 쉽게 쓰는 것은 비판의 지점이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커뮤니티 케어는 앞서 지역사회 기반의 절대적 부족, 사회서비스의 양의 부족, 인식의 부족, 당사자에 대한 존중성 부족 등으로 노인 복지를 같은 맥락에서 적용하고, 이해하고, 평가하면 곤란하다.
6. 존중과 배려, 지역사회의 시민으로서 이해되는 노인과 특별한 대상으로서 동정과 시혜의 대상인 장애인에 대한 역사/사회적 이해가 없는 커뮤니티 케어는 당사자들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어떤 집단, 대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맥락이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는 집단이 된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았다. 수 십 년간 차별, 배제된 집단이 하루아침에 지역사회에서 통합될 수 있는 것은 환상이다. 어느 기관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노력은 이런 차별과 배제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아주 미미하다. 그래서 법과 제도, 정책, 공적인 서비스 전달체계를 바꾸는 노력들이 병행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노력들이 빠진 실천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어떤 집단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역시나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7. 이래 저래, 구체성이 결여된, 이념화된 용어들이 당사자를 지원하는 데 있어서 열심히 하려는 이들의 힘을 소진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나의 이런 문제제기들은 매우 원론적이고, 이념적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론과 학문의 영역에서 논쟁하기 좋다. 문제는 현실에서 직접 실천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공허함을 준다는데 있다. 말은 누가 못 하나? 직접 해보면 다른데? 정말 열심히 하려는 이들이 있는데, 나름 적절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는데 듣기 좋으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실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들을 소진시키지 않은 방법은 쉼 없는 실천이지 않을까 싶다. 말보다 실천!!
8. 이념은 좌표이지만, 이념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긴장하고 있는가?
이념은 방향이다. 어디로 갈지 나침반의 역할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념이 없는 실천은 무의미한 시시포스의 일이다. 그러나 나침반만 가지고,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역시 의미 없다. 나침반이 있으면 직접 가봐야 한다. 그곳에 어떤 난관이 있고, 어떤 즐거움이 있으며, 그때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는 독일에 대한 비판을 할 때, 나침반만 가지고 논쟁하는 이들이라고 했다.
이념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천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이념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긴장하려면, 내가 직접 그 실천 현장에서 책임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잘난 척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9. 결국 다양한 영역에서 장애인의 커뮤니티 케어는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을 진행하는데, 그 영역에 대한 존중/연대/공유를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혼자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산을 오른다면 그 길이 틀리다고 이야 할 수 없다. 어떤 길은 험난하지만 빨리 올라갈 수 있다. 또 어떤 길은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 어떤 길은 위험하기도 하다. 길마다 다양한 감상이 존재한다. 우린 아직 산을 오르기 전에, 어떻게 올라갈지 탐색하고 있다. 어떤 이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 산이 아니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올라가 보자고 한다. 직접 가보지 않으면 그 길이 맞는지, 틀린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기꺼이 그 길을 가는 이들을 비판하기보다,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긴 줄을 연결해야 한다. 혹은 무전기를 통해서라도 서로 살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이런 게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해보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