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되지 못한 슬픔

- 주야, 주 선생님 집에 가서 살래?

by 바람결

어릴 때 그런 적 없었냐고 묻고 싶은데 멈칫하게 되는 질문이 있다. 대답 끝에 상대가 내 누추한 어린 시절을 연상하는 게 두려워서다. 가난을 들키고 나를 다시 보는 시선을 상상하는 단계까지 가면 <소공녀>를 꿈꾼 적 없었냐는 질문은 꽁무니를 빼곤 했다. 나는 늘 꿈꿨다. 백만장자의 상속녀 세라가 되거나 부자 엄마가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는 꿈을. 가난을 한방에 탈출하는 법을 동화에서 배웠다. 하지만 앞으로도 쭉 화장품 집 딸내미로 자라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은 교통사고처럼 일어났다.

얇은 옷을 입은 계절의 긴 또랑 길. 엄마가 나를 업고 놀이터 담벼락과 나란히 한 우리 집 쪽으로 걷고 있다. 엄마에게 업힌 기억으론 유일한 장면이다. 주변은 차분히 저녁 햇살이 내려앉았고 나는 조용히 엄마 등에 머리를 옆으로 기대 있다. 갑자기 화면이 일시 정지되고 혼자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엄마의 목소리만 재생된다.

"주야, 주 선생님 집에 가서 살래?"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혼잣말처럼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꿈처럼 아련한 기억의 그 장면이 재생될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걱정했다. 그것도 자식을 남의 집에 보낼까 망설이는 에미의 마음이라면. 억센 경상도 말로 깔찌뜯겨 피고름이 철철 흐른다는 표현으로도 담을 수 없는 아픔일 거라 생각했다. 자식 걱정이 평생인, 모성애라면 뒤지지 않는 내 어머니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극도의 가난이 안쓰럽고 한스러웠다.


어머니는 화장품(아 0 레) 아줌마라 불리는 방문판매원이었고 주 선생님은 어머니의 단골이자 중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들 둘만 두셔서 야무지고 얌전한 나를 많이 이뻐하셨다. 얼굴 반을 덮는 네모 안경을 쓰고 잇몸이 드러나도록 크게 웃어서 선한 인상을 풍기던 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그 집 양녀로 들어간다고? 뭔가 잘못돼 간다 생각했다. 내가 그려온 장면이 아닌 이유를 알아냈다. 내가 바란 건 부자 엄마지 부잣집 양녀가 아니었으니까. 나를 찾고 있을 친엄마가 부자이길 바란 거지, 부잣집 남의 엄마를 바란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때 확실해졌다. 나를 업은 이 가난한 여자가 내 친엄마라는 것이. 그리고 앞으로도 쭉 화장품 집 딸내미로 자라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짧은 순간 모든 게 확실해지니 대답도 쉬웠다.


“은~다(싫어)” 한 마디에 우리 대화는 짧게 끝났다.

언니들 말고 왜 나냐는 섭섭한 생각도, 버려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까지 키울 자신이 없어진 친엄마가 불쌍하단 생각에 괴로운 밤을 보냈고 부자 엄마를 기다려서 벌 받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의 나는 너무 조숙한 아이였고 가난은 컬러 TV처럼 생생했다.

가난한 엄마의 슬픔을 알아버린 조숙한 나는 제 일을 알아서 하는 키우기 쉬운 딸로 자랐다. 처음부터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IQ 150이 넘는 남동생은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지만 나는 받아쓰기 시험에도 교실에 남겨지는 그저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5학년 때 담임에게 공부 때문에 무시당하는 치욕을 겪고부터 독을 품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1년 후 수학대회에서 여학생 학교 대표로 뽑히는 우등생으로 변신했다. 중2 때 한 번은 전교 1등을 하는 바람에 엄마가 2학년 담임 전원에게 회식을 쏘았을 때도(그런 악습을 학교의 전통이라고 했다) 엄마가 돈을 많이 쓰게 만든 게 죄송한 아이, 다시는 전교 1등이 하고 싶지 않은 아이였다.

그게 실은, 가난한 집 막내딸은 양녀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상처의 후유증이라는 걸 까맣게 모른 채, 나는 점점 더 효녀 되기에 열중했고 어른들은 ‘애어른’인 나에게 열광했다.





‘애어른’이 자랑이 아니라 시린 상처였다는 걸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아이가 제 슬픔을 짓눌러서 못 느낀다는 건, 엄마가 불쌍해서 자기 불쌍한 줄을 모른다는 건, 결국 아이 안에 자기가 없다는 의미라는 걸 쉰이 다 돼서야 깨달은 것이다. 제 마음은 모르고 엄마 마음에 열중하느라 태아기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덜 자란 ‘어른애’, 그 모습의 나를 알아차린 건 휘발되지 못한 슬픔이 내 일상 곳곳에서 삐거덕거리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환경인데 공부 안 하는 학생에게, 엄마 고생을 몰라주는 딸에게 나는 늘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애어른’이 상처인 줄도 모르고, 그저 애다운 그들에게 ‘애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비난하면서 그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심리상담을 시작하고 그 이유를 거슬러 간 곳에서 어린 주야를 맞닥뜨렸다. 가난한 엄마에게 버림받을까 봐 엄마를 가난에서 구출하고 싶었던 아이,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했고 마침내 엄마가 사는 이유가 자기라는 엄마 말에 행복했던 아이, 엄마 행복이 자기 행복인 줄 알았던 아이. 그 어린 주야의 휘발되지 못한 슬픔을 만났다.

꼬옥 안아줘야지. 그땐 니 슬픔을 몰라봐서 미안하다 해야지. 그래도 애썼다고 말해줘야지.ㅡ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어른의 품을 내주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눈시울에 손이 갔다.

그리고 숙제가 남았다. 어릴 적 내 슬픔을 압도했던 내 어머니의 슬픔과도 작별해야 한다고 상담사가 말했다. 그래야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온전한 나를 앉히고 내 감정을 보살피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상담사의 다음 말이 따뜻했다. 그러면 나도 내 아이의 감정을 볼 수 있고 받아주는, 품이 너른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으리란 희망이 그려졌다.


어머니의 슬픔과 작별하기 위해 슬픔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글이 쓰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슬픔이라고 쓰고 내 슬픔으로 읽히는 글. 그래서 이 글은 내가 지금까지 쓴 글 중에 가장 쓰기 힘든 글이었다. 앞으로 쓰게 될 가족 이야기가 또 얼마나 어머니와 나를 발가벗은 기분이 들게 할지 많이 두렵고 염려된다. 그래도 계속 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을 쓰며 위로받는 글맛을 이미 알아버렸고 이렇게 긴 시간 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내가 꽤 근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부디 내 글이 어머니에게도 슬픔과 작별하는 위로의 글로 가 닿기를. 모두에게 아픔만 남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숱한 시간들을 내가 잘 견딜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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