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T CONNECTOR Jan 23. 2021

리미니와 펠리니: 머무름과 떠남의 도시

Connecting the dots #1 Rimini, Italy

리미니. 그저 학교 앞 파스타 맛집으로만 알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고향일 줄이야!

리미니라곤 맛집밖에 모르던 나를 리미니로 이끈 건

갑작스레 찾아와 외롭던 나를 울리고, 영혼을 채워주던 펠리니의 영화들이었다.


Connecting the Dots #1
Rimini, Italy ( City ) - Federico Fellini (Film Director)

나의 첫 글감이 된 한 점은 바로 불현듯 떠올라버린 멋진 도시, 리미니.

그리고 두 번째 점은 공교롭게 오늘이 마침 생일인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Dahyun Kim


펠리니 사랑으로 가득 찼던 22살의 나는 리미니로 향했다.



About.. Federico Fellini

리미니가 낳은 거인 페데리코 펠리니


Federico Fellini (1920-1993)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펠리니를 모른다고 해서, 문화를 모르는 미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붙들어 매시길. 영화를 잘 모르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알프레드 히치콕',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네임드 영화감독들과 달리 '페데리코 펠리니'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 있다. 나 또한 이탈리아 영화에 빠지기 전까지 펠리니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씨네필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안습'인 국내의 인지도를 이해한다.


라임이 은근 잘 맞아 입에 착착 붙는 이름의 이 감독은 이탈리아의 대표 거장으로, 영화 <달콤한 인생>(1960)으로 잘 알려진 감독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더하자면, 페데리코 펠리니는 미워할 수 없는 악동 같은 느낌을 준다.

장난기 넘치는 광대와 서커스의 화려함은 어린 소년의 판타지처럼 느껴지며, 여성의 매력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그의 열광은 짓궂을 정도다. 실제로도 펠리니는 허풍과 과장이 심한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네오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라는 상반된 두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생과 아름다움을 논하는 그의 천재성에 있다.


©Dahyun Kim | 리미니의 거리 via La dolce vita (1960) | 표지판에 아주 친절하게 연도까지 적혀있다.

"리미니의 어떤 것들이 펠리니를 그토록 멋진 감독으로 키워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싶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재능은 땅에 묻힌 금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리미니에 가면 나도 그처럼 될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단 말도 안 되는 기대감도 살짝은 있었다. 빛나는 천재성의 한 조각을 찾아 떠난 리미니에서 내가 찾은 것은, 의외로 묵직한 떠남과 머무름에 대한 고민거리 한 조각이었다.





About.. <Amacord>(1973)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태초에 <Amacord>가 있었다.


<Call Me by Your Name>(2017) Dir. Luca Guadagnino

이탈리아의 매력을 잘 담아낸 대표적인 영화, 바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아닐까 싶다. 티모시 영상 화보집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본인은 이 영화를 이탈리아 영상 화보집이라 명명하고 싶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뒤로 한 채, 이탈리아의 전원적 풍경에 푹 빠진 나 같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내용도 연기도 음악도 훌륭하지만, 이 영화의 신의 한 수는 바로 이탈리아의 풍경이었다. 한 번 상상해봐라. 이 영화가 뉴욕 한복판을 배경으로 한다면, 아마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은 '덧없지만 아름다운, 무공해의 첫사랑'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Call Me by Your Name>(2017) Dir. Luca Guadagnino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탈리아 중북부의 시르미오네라는 도시에서 촬영되었다. 이탈리아 내에서는 전부터 유명한 곳이지만, 영화의 인기 덕에 가르다 호수는 한국인들에게 핫한 이탈리아 여행 인기 코스가 되기도 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성공리에 이어간 이 이탈리아 풍경 영화(?)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펠리니의 영화가 한 편 등장한다. 바로 리미니를 배경으로 한 영화, <Amacord>(1973)이다.

<Amacord>(1973) Dir. Federico Fellini

자신을 길러낸 도시와 자신의 유년기에 바치는 듯한 이 영화는 빛나는 리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천방지축 남자아이들의 성장을 다룬 이 영화는.... 당신이 펠리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본다면 웃으며 볼 수 있을 것이고, 이 영화를 통해 펠리니를 처음 접한다면 '뭐야 이 사람 변탠가.. 정신 나갔나..' 하며 고개를 내젓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영화 속 리미니의 아름다움에는 모두 이견없이 동의하리라 확신한다.

<Amacord>(1973) Dir. Federico Fellini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리미니가 궁금한 당신에게는 이 영화를 추천한다. 무심하게 연 창문 밖의 풍경, 사람이 가득한 해변가, 리미니의 거리와 광장들에 반하게 될 것이다.

* 'Amacord'는 'io mi ricordo'의 에밀리오 로마냐 방언으로 '나는 기억한다'라는 뜻이다.

* 영화 <Amacord>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 있고, OTT 중에선 왓챠에서 시청 가능하다.    
   참고로 <나는 기억한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와있다. (유튜브에는 한글 자막이 없다.... 힘들게 봤다..)




영화와 인물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해두고, 본격적으로 리미니를 누비던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리미니의 첫 날을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펠리니의 발자취를 좇아 찾아간 리미니의 첫 끼는 일식집의 All you can eat이었다. 낭만보다는 허기를 더 먼저 채우고 싶던 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정말 맛있었다! ^^





sun-kissed, Rimini


배를 땅땅 두들기자 그제야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동안 마침 딱 좋게 해가 저물어 준 덕분일까, 식당을 나서서 만난 풍경은 'sun-kissed' 그 자체였다.


태양이 콕 집어 이 도시에만 입맞춤을 내린 것 같은 황홀함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Dahyun Kim

시작부터 예감이 좋던 리미니 여행. 사실 이곳은 별다른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는 아니다. 그저 바다가 있고, 날씨가 좋고. 리미니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휴양 도시다. 다르게 말하자면,

짧게 반짝이는 여름을 불태우고 나면 다들 제각기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이내 텅 비어버리는 도시다.


변화무쌍한 여름, 그리고 이어지는 활기를 잃은 채 여름만을 기다리는 가을, 겨울, 봄을 보내는 이 도시는 어린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었던 것 같다. 낭만적인 summer love가 시작되는 도시이자, 서커스, 광대, 오만 화려함이 집결하는 도시에서 자라난 펠리니의 영화는 화려한 낭만, 고독 그리고 인간 본연에 대한 고찰이 가득하다.




펠리니의 발자국을 좇다: Piazza Cavour의 분수, 펠리니의 첫 영화관


사실 리미니에서 펠리니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물며 리미니 공항의 이름마저도 Federico Fellini International Airport일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펠리니가 흡수했을 이 도시의 분위기를 여유롭게 즐기기로 결정했다. ( 별로 볼 것도 없지만 말이다 )


나의 첫 목적지는 Piazza Cavour. 사실 이 Cavour 광장을 방문하는 것이 나의 여행의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작은 도시여서일까, 아니면 이 부근이 펠리니의 나와바리였던 것일까? 광장으로 걸어가는 길목에서 발견한 건 바로 펠리니가 태어나서 처음 영화를 봤던 동네 영화관이었다.


©Dahyun Kim

사실 멀리서 멋진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거리가 좁아서 이 정도가 최대였다. 최신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고, 건물이 굉장히 깔끔한 것을 보니 아직도 운영 중인 것 같았다. 그냥 가볍게 구경하러 간 거긴 하지만 막상 가보니 별달리 할 일이 없어서 주변 가게들 구경하다가 주얼리 샵에 들어가서 기념품을 사기로 했다.


©Dahyun Kim

리미니 기념품으로 고른 건 보라색 원석이 박힌 귀여운 보라색 반지. 마침 거리의 화단에 보랏빛 꽃이 있어서 함께 사진을 한 장 찍어봤다. 오랜 여행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바람에 손도 팔도 그다지 예쁘진 않지만.. 꽃과 반지의 색 조합이 왠지 짜릿해서 (?) 남긴 사진이다. 별거 아니지만,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서 도착한 Piazza Cavour. 이 광장은 앞서 소개한 펠리니의 영화 <Amacord>의 가장 아름다운 씬 중 하나인 눈싸움 씬이 촬영된 곳이다. 영화 속 광장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난데없이 공작이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공간으로서 그려진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광장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Amacord>(1973) Dir. Federico Fellini


그 날이 바다에 풍덩 들어가도 춥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날이어서 그랬을까, 영화 속 꽁꽁 얼어붙은 잿빛의 분수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느긋이 걷다가 마주한 한산한 광장과 분수는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Dahyun Kim

아차, 산책하던 강아지가 목이 마를까 분수의 물을 떠주는 아주머니도 보았다.

이런 소소한 일상적인 장면들이 여행의 행복함을 배가시켜준다.

©Dahyun Kim

 

어딜 걸어도 한산하던 리미니는 떠남의 도시가 맞다. 광장도, 좁은 골목골목도, 심지어는 버스도 비교적 한산하다. 북적이는 곳이라곤 동네 맛집과 해변가뿐이었다. 젊은이들은 큰 도시로 떠나고, 여름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도 다시 떠나간다. 남겨진 사람들은 떠나간 가족과 손님들을 내내 기다리는 듯 보인다.

( 어쩌면 수업, 매체와 짧은 여행을 통해 리미니를 접한 나의 일반화일지도 모른다. )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곳곳의 펠리니를 찾아다니니 슬슬 허기가 져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미리 정해두었다. 바로 리미니에서 탄생한 음식인 피아디나(Piadina).

©Dahyun Kim

빵과 치즈, 고기와 야채의 조합은 정말 유럽에서는 안 먹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흔한 조합이다. 사실 이건 너무 평범한 음식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또 명물이라니 먹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원조도시라고 해서 꼭 엄청 맛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맥도날드의 탄생지에서 먹는 빅맥의 맛이 꼭 더 뛰어나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꼭 맛이 특별해야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피아디나는 비교적 평범했지만, 그래도 리미니의 이름 모를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창 밖을 구경하며 피아디나를 먹는 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펠리니의 발자국을 좇다: 8과 2분의 1, 그리고 해변


©Dahyun Kim

혼자 펠리니의 흔적을 찾아다닌 뒤, 친구와 해변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바다에 들어가 더위도 피하고, 휴양도시의 매력을 탐색하고 싶었다. 그러나 버스에 내려 지도를 보며 조금 걷다 보니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펠리니의 <8과 2분의 1>에 나오던 서커스. 비현실적인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서커스 천막은 추후에 검색해보니 매년 6월에 열리는 Al Meni라는 행사의 장소였다. 때마침! 하필이면! 행사가 열리는 짧은 찰나에 리미니를 방문한 나..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나 싶었다.


행사장 내부의 모습이 궁금할까 싶어 현장감이 느껴지는 발로 찍은 영상을 첨부한다. Al Meni는 에밀리오 로라노 지역의 셰프들과 다양한 국적의 셰프들이 모여서 벌이는 미식 행사였다. 부스가 정말 많았는데 와인 한 잔 사먹고 말았던 것이.. 아직도 큰 후회로 남는다. (?)




©Dahyun Kim

서커스 천막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 길게 늘어선 하늘색 스트라이프의 부스들에서는 지역 상인들의 공예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미 리미니 기념품을 하나 사긴 했지만, 이런 금쪽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는 법. 소문난 맥시멀리스트인 나는 머리를 질끈 묵고 쇼핑에 나선다.



©Dahyun Kim


땡볕 아래 치열한 쇼핑의 결과,

나는 오른쪽에 있는 <펄프픽션> 가방을 샀다.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특히 이탈리아어로 적힌 명대사가 맘에 들었다.





<Pulp Fiction>(1994) Dir. Quentin Tarantino


"Ti amo zucchino mio." (I love you, Pumpkin.)

"Ti amo, coniglietta mia." (I love you Honey Bunny.)

사랑스럽지만 사실 부부 강도단이 은행을 털기 전에 서로에게 속삭이는 사랑의 말이다.


©Dahyun Kim

영화를 계기로 찾게 된 리미니에서 구입했기 때문에 괜히 더 의미 있는 기념품이다.



이 가방이 정말 너무나도 맘에 들었던 나머지,

이후 이어진 장장 2달간의 여행 동안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의 애착템이 되었다.



그리고 리미니 여행이 1년 반은 지난 지금도

이 가방은 단연 나의 최애 에코백이다.




에코백 얘기에 잠깐 너무 신나버렸다. 다시 리미니의 해변가로. 8과 2분의 1 텐트와 플리마켓 구경을 마치고 친구와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는 아름다웠고, 날씨는 참 더웠다. 6월 이탈리아의 찜통더위 덕분에 우리는 바다에 겁 없이 뛰어들 수 있었다. 그림 같은 바다에 뛰어들자 발에는 미역 같은 것들이 줄줄 감겼고, 머리는 바닷물에 젖어 끈적거렸다. 그렇지만 1시간 후 돌아서서 해야 하는 일도, 과제도, 공부도 없이 낯선 바다에서 수다 떨며 깔깔댈 수 있던 이 날, 미역과 끈적한 머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는 리미니의 햇빛에 몸을 말리고, 바다에 두세 번은 더 뛰어들었다.


젖은 발로 신발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비키니에 맨발 차림으로 부스까지 달려간 기억도 선명하다. 와인 한 잔씩 마셔보자고 맨 발로 6월의 태양에 무시무시하게 데워진 아스팔트를 질주했던 우리는 참 멍청했다. 와인 글라스를 쥐고 앉아 바닥이 뜨거워 발을 동동거리던 우리. 일상복 차림인 사람들 사이에 수영복 차림으로 멋쩍게 앉아, 아무도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었지. 멍청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참 즐거웠었다.


해변에서 마신 리미니의 와인과 수박 맛 아이스크림. 둘의 조화가 생각보다 너무 좋았고,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알딸딸한 상태로 따끈한 햇빛 아래 누워 있던 순간은 너무나 평화로워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리미니의 휴양에 너무 심취해 있었던가. 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고, 우리는 체크아웃 후 역까지 가기에 조금 빠듯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결국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던 Rimini 기차역까지 헐떡이며 달려갔고, 땀에 젖은 얼굴로 간신히 도착한 기차역에서 늘 그렇듯 우리보다 조금 더 늦는 기차를 기다렸다.



리미니를 떠나며



리미니를 떠나며 남긴 한 조각의 푸티지


나 또한 수많은 여행객들처럼 결국 리미니를 떠나왔다. 조금만 더 머무르면 좋겠단 생각이 굴뚝같지만, 어쩔 수 없이 리미니를 떠나보내야 했던 지난여름. 이런 마음을 품은 건 비단 나 하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떠나야 하지만 머무르고 싶은 도시이자,

누군가에게는 머물러야 하지만 떠나고픈 도시인 리미니.


펠리니는 결국 리미니를 떠나 로마로 향했고, 그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펠리니의 로마보다, 펠리니의 리미니를 더 기억한다. 만인의 도시인 로마에 정착했지만, 펠리니의 뿌리는 늘 리미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유년기의 향수는 그 어떤 경험보다도 뇌리에 더 깊게 각인된다. 이는 파아란 종이를 집어 들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힘껏 덧칠을 해 파란색을 지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아마 덮으려 해도 자꾸만 튀어나오는 파란색을 마주하거나, 종이가 파랗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 어울리는 파아란 하늘, 파아란 바다를 그리게 될 것이다.


펠리니라는 거인을 길러낸 도시 리미니에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잠깐 마주하는 리미니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아름답고 꿈결 같은 휴양도시'일 뿐이다. 단지 펠리니의 비결은 그의 머무름에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갈 때에 묵묵히 머무르며 돌아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리미니의 정서를 예술로 녹여낸 것은 바로 펠리니의 빛나는 천재성이다. 펠리니는 <Amacord>에서 추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이 된, 그런 리미니를 그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다시는 리미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에게 리미니는 덮으려 해도 튀어나오는 파란색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에게 리미니는 내 도화지에 찍힌 작지만 반짝이는 잊지 못할 파아란 한 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 FINE -

        


        

매거진의 이전글 . 내가 점을 잇는 이유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