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마야 5

소통/사랑/춤-영원회귀

by 행복이

<소통/사랑/춤>


소통


현태에게 쓴 편지를 나는 사흘이나 가방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부치기가 왠지 주저되었지요. 내가 쓴 편지는 나로선 퍽 정직하게 쓴 것이어서 만에 하나라도 현태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면 자칫 오해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나는 내 눈과 내 가슴을 신뢰하기로 했습니다. 현태의 성실한 눈과 가슴을 발견한 것은 바로 내 눈과 내 가슴이니까요. 말이란 건 사실 진실을 주고받는 데에는 얼마나 소용없는 것일까요. 현태는 내 긴 잔소리 뒤에 숨어 있는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틀림없이 알아낼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곱 번째 우체통 앞을 지나면서 내 편지를 우체통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p87~88.


마야에게 소통의 첫 단계는 ‘자기 자신의 눈과 가슴을 신뢰하는 것’이다.

말은 불완전하고 진심은 말보다 먼저, 말보다 깊게 전달될 거라 생각하는 마야!

편지에 내비친 그녀의 진심을 현태는 읽어낼 것이라고 확신하며 일곱 번째 우체통 앞에서 편지를 밀어 넣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따뜻한 이야기는 모두 목구멍쯤에서 사라져 버리고 고작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이 ‘잘 잤니?’라니요. 이런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처음 사흘간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그리고 현태에 대한, 또한 말에 대한 부아가 치밀어서 볼이 부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리석다 싶었던 탓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마야는 난생 처음으로 커다란 것을 배웠습니다. 혀로 뱉아내지 못하는 말, 목구멍 속에서 숨어 버리는 말, 그래서 언제나 가슴 속에서만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말-그 말을 듣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귀로 듣는 말보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란 것을 나는 알게 된 것입니다. 가슴 속의 말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하나의 ‘소리’가 아니라 어떤 ‘진실’이니까요. 그래서 그것은 눈으로 듣는 것입니다. ‘눈으로 듣는 말’을 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것은 가슴을 우러나와 시선을 통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어떤 수식이나 미사여구도 필요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진실’만이 가능한 말이니까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진실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그것이 바로 ‘눈으로 듣는 말’의 정체인 것입니다. p182.


가슴 속의 말은 진실이고 눈으로 듣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멋진 소녀 마야!

상대의 눈, 시선, 호흡,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것—그것이 마야가 말하는 ‘눈으로 듣는 말’이다. 소통은 말의 기술이 아니라 진실성의 문제이기에 잘 꾸민 표현보다 솔직한 마음의 떨림이 더 정확하게 전해진다는 것을 우린 마야에게서 다시금 배우게 된다.


사랑


“혜영이 뭐하니?” 하고 민우 오빠가 고개라도 들이밀면 괜히 화를 내곤 빨개지며 얼굴을 돌려 버립니다. 작은 언니가 애써 민우 오빠를 피하고 혼자서 낑낑대는 게 얄밉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지만 내가 어떻게 도와 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냥 눈치만 볼 밖에요. 민우 오빠는 민우 오빠대로 또 왜 그렇게 둔한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하는 건지 여전히 싱글대며 우리 집엘 들락거리고 있으니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p15~16.


언니의 비밀에 괜히 괴로워져서 나도 요즘엔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 그럴 땐 누워서 언니처럼 소설도 읽고, 시도 읽고, 일기도 써 보고, 온갖 흉내를 내어 봅니다. 많이 많이 아프겠지만, 참으로 슬프고 괴로운 일인지 모르지만 나도 빨리 자라서 나 자신의 비밀을 갖고 싶습니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색깔 고운 그런 비밀을. p19.


마야는 언니의 짝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성에 대한 눈을 조금씩 떴으리라...짝사랑하는 언니의 마음이 애잔하지만 아름다운 느낌으로 다가 오면서 자신도 은근히 경험하고파 하는...


개학준비를 하면서, 또는 허겁지겁 방학숙제를 하면서도 내가 우리집 대문간의 그 낡은 우체함에 꽤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요즈음의 나는 꽤나 심심한 모양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남모르게 우체함을 열어 보는 내가 가여워져서 나는 슬슬 현태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중략)

그 무섭게 파도치는 바위 위에서 현태와 내가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무슨 약속을 하긴 한 것인지 이런 원초적인 의문에까지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 바닷가에서 퍽으나 가까워졌다고 믿었던 현태와 나의 사이가 마치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리, 서울과 부산만큼이나 멀게 느껴졌습니다. p71~72.


우체함을 자주 확인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이 예민해진 마야.

가깝다고 생각한 둘 사이가 부산과 서울만큼 멀어진 듯한 거리감에 서운함과 미움이 솔솔 싹트지만 현태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마야.

혹시 마야가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에 나오는 이 싯구를 알았더라면 좀 위안이 되었을까?

기다림은/만남을 목적으로하지 않아도/ 좋다./가슴이 아프면/아픈 채로,/바람이 불면/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아득한 미소.

1987년에 발표된 시라니...엊그제 같은데...


사랑한다는 것, 특히 아무도 몰래 혼자서만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사랑을 알리지 않고 간직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을까요? 아아 나는 이젠 무서워졌습니다. 짝사랑이란 너무 커다란 형벌입니다. 흰 잠옷 앞자락에 찍혀져 있던 그 선홍색이 꼭 언니의 사랑의 색깔 같았습니다. p88~89.


민우오빠를 짝사랑하는 작은 언니가 괴로운 마음을 잊으려고 공부에만 매진하다 마침내 코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이다. 이에 마야는 짝사랑이 두렵기까지 하다. 피로 물든 사랑이라니...


너의 편지가 내게 준 기쁨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 편지를 받은 이후 나는 매사에 퍽 너그러워졌다. 학과 선택과 수험준비로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내 마음에 일종의 따뜻한 기류가 감돌아 평화로운 기운에 잠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사랑할 수 있게 도었다. 새벽이면 내 방 창문을 기어드는 한 줄기 햇빛을 사랑하고, 네게 편지를 쓰게 하는 이 만년필과 한방울의 잉크를 사랑하고, 늦은 밤 내 책상을 밝혀주는 스탠드 불빛을 사랑하고, 몇 시간인가의 공부 후에 머리를 들었을 때 문득 찾아드는 약간의 현기증까지 나는 깊게깊게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오랜시간 긴장으로 몰고 가는 미적분의 어려움까지 나는 사랑하려고 한다. 모두 네 편지 덕택이다. 감사하다.(중략)

노상 감기로 골골거린다니 이불을 차고 자서 그럴 거야. 이불 꼭꼭 눌러 덮고 얌전히 잘자. 바다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조금만 많이 해. 75년 10월 20일 새벽녘 현태가. p.93~94.


마야의 진심어린 편지를 읽고 보낸 답장 속에는 현태의 구구절절하고 흥분된 사랑의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현기증에 미적분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 속에는 마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바다 생각보다 본인 생각을 더 많이 하라는 마지막 귀여운 글귀 속에서 현태의 순수하고 풋풋한 애정 표현도 느낄 수 있다. 우려와 달리 마야의 진심 어린 편지가 현태의 세계를 온통 장미빛으로 바꿔 놓았다.


“깜빡 잊을 뻔했다. 도로 부산 가져갈 뻔했잖아. 이거 마야 주려고 부산에서 가져온 거야. 바다소리가 들릴 거야.”하면서 현태가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한쪽 모서리가 좀 까여나가긴 했지만 아주 커다란 소라껍데기였습니다. “고마워. 현태 오빠.” p185.


사랑의 상징이자 두 사람의 추억을 담은 작은 기념물 소라껍데기! 요즘 아이들은 저런 거 선물 잘 안하겠지? 바다소리 들을 때마다 부산에 있는 자신을 생각해 달라는 거겠지? ‘오빠’라고 불러 주었다. 처음으로...현태 오늘 잠 다 잤다...


“그런데 너 가방은 왜 들지 않고 안고 다니니? 기뻐서 가슴이 떨려서 그래?” “이거? 아냐, 아냐. 그게 아니구 사실은 나 너무 기뻐서 발이 땅에 닿질 않아. 자꾸만 내가 붕 떠서 날아갈 거 같애. 그래서 가방을 가슴에 꽉 끌어안으면 좀 괜찮을 거 같애서 그래.” p218.


이 작품은 감정 표현들이 너무 좋다. 약간은 과장되어 보이나 더 순수해 보이지 않나? 날아갈까봐 가방을 꽉 끌어안다니...드디어 아빠를 만나게 된다니 얼마나 눈물나게 기쁠까...부녀간의 사랑이 너무 보기 아름답다.

그날 밤, 오빠는 밤새 불을 켜놓고 낑낑대는 기척이 역력했습니다. 아마 편지를 썼던 모양이지요. 막상 전화에 대고는 한 마디도 못하고, 그 부푼 가슴을 글로 적으려는 모양이었습니다. 얼마나 명문을 썼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 날 이후로 오빠는 아주 쾌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짧고 무미한 한 통화의 전화와 그 전화로 인해서 얻는 조그만 확인에도 그렇게 행복해지는가 봅니다. p245.


마야보다 어린 사랑! 낑낑 대는 사랑이라니...오랫동안 좋아한 줄 모르다가 후배가 떠날 때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던 오빠. 오빠가 사랑하는 후배로부터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댄다. 그래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야 오빠가 연애 편지 쓴다고 저 난리다. 항상 보고 느끼는 거지만 사랑 앞에선 여자가 더 섬세하고 남자는 우둔한 느낌이랄까...


현태 오빠,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효과 있는 환각제가 되고 싶어. 그래 가지고 오빠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 현태 오빠, 지금부터 눈을 감고 내 말을 들어. 오빠는 혼자 있는 게 아냐. 마야랑 같이 있는 거야. 자, 마야가 왔으니 바다로 가. p252.


대학 입시에 떨어진 현태 오빠를 위로해 주기 위해 환각제가 되고 싶다는 마야...사랑의 힘으로 현태는 좌절을 극복하고 의대 합격이라는 좋은 결실을 맺지 않을까 한다.


마야는 참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많고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많습니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공간과 시간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천국의 아이들’에서 장 루이 바루가 말한 것처럼 “꿈은 크게, 생활은 소박하게” 그렇게 살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 누구라도 어느 순간엔가 몹시 심심해져서 마야가 보고 싶을 땐 그냥 입속으로 조그맣게 쁘띠 디아블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면 언제나 쬐그만 마야가 입술 끝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너무 자주 부르진 마세요. 그러면 마야는 숨이 차서 갈 수가 없어지니까요. p259.


사랑받고 사랑하고 행복해 하는 쁘띠 디아블!

꿈은 크게 가지고 생활은 소박하게 하면서 아마 멋지게 살아갈 것이다.

마야는 온통 사랑이다.

마야는 언니의 짝사랑을 지켜보며 사랑을 관찰하고, 현태 오빠를 통해 사랑을 느끼고,

때로는 두려움, 설렘, 서운함을 모두 경험하며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한 층씩 배워가는 과정을 겪는다.

마야의 사랑은 집착도 아니고, 어른의 사랑처럼 계산적이지도 않고,

그저 “좋아해서 좋고, 기다려서 아프고, 웃음 한 번에 세상이 밝아지는” 순수한 감정의 성장 기록이다.

민우오빠와 작은 언니, 큰오빠와 이명지, 주혜아빠와 주혜, 마야와 현태를 떠올리며 현재의 사랑을 생각해 본다.


갑자기 주혜 아빠가 틀어오시더니 어떤 레코드를 틀었습니다. 곡명은 모르겠지만 리듬은 틀림없이 왈츠였어요. 왈츠는 학교에서 무용 시간에 시험까지 쳤으니까요. 주혜 아빠는 고깔 모자를 벗고 에이프론을 끌르시더니 정중하게 주혜에게 춤을 청했습니다. 오른손을 크게 휘두르면서 허리를 정중하게 굽히시겠지요.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왈츠 선율 속에 아빠와 딸이 조용히 돌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윽고 선주가 나에게 춤을 청했습니다. 우리는 무용 시간에 시험칠 때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부드럽게 선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정이와 지연이, 현숙이와 은수도 각각 짝을 지어 우리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무르녹아 갔습니다. p240.


Let's dance!

조르바! 여기 사랑의 춤판에 너도 끼고 싶지 않니? 니체야 '영원회귀' 어때? 소통과 사랑으로 매순간을 행복하게 산다면 영원히 살 수도 있겠다. 마야가 내 맘 속에서 영원히 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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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정 0번째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