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우렁이 여학생“
|봄비가 내리는 오클랜드|
그대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
그대 바람 소릴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걸어요
오늘 오클랜드에 갑자기 다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득 떠오른 아주 오래전 내가 고교시절적의 곱고 낭만적인 노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와 그리고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 주었던 친구, 은성이가 떠올랐다. 푸르른 그 아이가 그리워졌다.
아주 크고 맑은 눈과 동화 속의 소녀같이 예쁜 얼굴의 은성이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반이 되어 친구가 되었다.
처음에 워낙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의 은성이가 나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무척 쾌활하고 여러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친구라서 말을 걸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웠었다.
|우렁이 친구|
어느 아주 무더운 여름날, 한낮 땡볕에서의 체육시간을 끝마치고 너무 더워서, 수돗가에 가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오니, 나의 책상 위에는 그 당시 막 새로 나와서, 십대였던 우리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던, 종이컵과 얼음이 같이 나오던 그 시절의 콜라 자동판매기, 내가 또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아주 시원한 콜라가 놓여있었다.
콜라 컵 위에는 체육시간 후 옷을 갈아입는다고 난리법석인 교실 안에서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꽃무늬의 깔끔한 티슈가 덥혀져 있었고, 그 옆에 아주 예쁘고 아기자기한 핑크색 하트 메모지에는,
"많이 덥지? 콜라 좋아하길래..." 그리곤 예쁘게 그린 하트모양이 점점 작아지는 3개…
대체 누구지? 이거 내 거 맞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콜라를 번쩍 들고 반아이들에게 외쳤다.
"야, 이거 나 마시라는 거야? 잘못 갖다 놔도 난 몰라, 그냥 마셔버릴 테니 아주! 하하하, 누구야 대체? 여기 뭐 탄 거 아니지? 진짜 마신다 지금?"
나의 다른 친구들이 냅다 달려와 이미 콜라를 반쯤 마시는 나를 과격하게 저지하더니, 지들이 나머지를 마시고 얼음까지 우걱우걱 씹는다.
다들 많이 놀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남고나 공고가 아닌 순도 100프로 10대의 여학생만 다니는 여고였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여고생들은 어떨지 몰라도, 당시의 우리들은 우리끼리 있을 때에는 여자여자한 여학생은 거의 없었고, 각자의 개성이 매우 넘치는, 용감무쌍하고 목소리도 큰, 그렇지만 성별은 그래도 여자인 그저 공부와 운동을 열심히 하던 멋진 고등학생들 (특히 나와 내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쿨했었던 여고시절|
중2 때부터 시작된 학구열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이어졌고, 사비로 과외를 하는 다른 동급생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공부 외에는 다른 것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헤어스타일은 늘 아주 짧은 커트머리에 호리호리한 몸 그리고, 당시엔 눈이 나빠서 안경도 쓰고 있었다 (승무원 때 레이저 수술로 렌즈를 탈피했다).
또한 우리 세대부터 시작된 고교생 복장 자율화로 인해서, 가장 멋을 내기 좋아한다는 십대들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예쁜 옷들을 신경 써서 입던 다른 여고생들과는 다르게, 나는 주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아주 빠른 학다리 권법으로 아주 높은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던 학교를 뛰어다니는, 지금 상상해 보아도 남학생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던, 나름 쿨했었던 여고생 시절이었던 것으로 회상한다.
|환골탈태??|
대한항공에 승무원으로 지원하였을 때의 일이다. 필기시험을 치르고 나오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전교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신혜를 만나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뛰어갔는데, 그 애는 나를 전혀 몰라 보았다.
그래서 내가 같은 반이었던 선영이라고 하였더니, 그야말로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성형을 하였냐고 물어보며, 고등학교 시절과는 완전 다른 사람같이 너무 여성스러워지고 예뻐져서 전혀 몰라 보았다고 하였다.
달라지긴 했다. 세수를 했고, 안경도 벗고 , 머리도 기르고 또한 화장까지도 했으니.... 그런데 몰라볼 정도라니.... 내가 크면서 많이 예뻐진 것인지 아님 그저 고교시절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꽤나 비루했던 행색의 나만을 기억했던 신혜라서 못 알아본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무척이나 여성스럽고 정말 예뻤었던 신혜는 최종 합격자 명단에 없어서, 물어볼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그렇게나 아름다왔던 신혜가 뽑히지 않은 것은 아직도 의아하다.
입사 지원 전에 나의 친구들한테 듣기로는 악력이 센 사람들을 뽑는다고들 하였었지만, 악력테스트를 실제로 거치지는 않았었다.
|우렁이 친구의 정체|
다시 과거 고교생시절로 돌아오자면, 나의 책상에는 가끔은 시가 적힌 카드와 안개꽃에 쌓인 장미꽃, 필기구 혹은 예쁜 소품들, 또 추운 날엔 따뜻한 핫코코아를 놓던 누군지 모르는 우렁이 친구가 있었다.
나는 정말 누구인지 처음에는 많이 궁금해했었지만,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뭐 그러나 보다 하고 바쁜 고교생의 나를 살아내가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반의 나와 평소에는 별 다른 교류가 없던, 꽤나 부자라고 들었던, 사거리 약국집 딸 유정이 (아!… 그러고 보니, 유정이 엄마께서 약사이셨었는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약사가 되어있다. 수수께끼 같은 인생이란....)라는 친구가 같이 매점을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난 도시락도 싸왔고, 그날은 매점에 갈 돈은 없으니 나중에 같이 가자고 하자, 자신이 할 말이 있고, 둘의 간식과 음료를 살 수 있는 용돈이 충분히 있다고 하였다.
그때 나는 아! 그동안 나에게 그 많던 손편지와 선물, 그리고 맛난 간식들을 다 유정이가! 다 사다준 거였었구나라고 짐작을 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날 유정이가 매점에서 단 둘이 있을 때, 나에게 돌아오는 그 주말에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었기 때문이다.
|인생 첫 영화 Killing Field|
유정이와 나는 그날 매점에 같이 가기 전까지는, 따로 만나서 밥을 먹거나, 간단한 인사 외에는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전에는 영화관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주말에 해야 할 공부가 많이 밀려 있었지만, 그동안 나를 정말 친절하게 챙겨주고, 잘해준 친구였었기에, 사실 조금은 낯설고 불편한 마음이었었지만, 사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엄마께 부탁하여 용돈을 받고, 주말에 같이 만나서, 그 옛날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실제 사건의 영화였었던, 1984년도에 개봉한 Killing Field (킬링필드)를 보러 갔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캄보디아 내전과 킬링필드 사건이 배경이었던 영화였다.
미국 기자 시드니 샨버그가 그의 친구이자 통역이었던 디스 프란을 참혹한 대량 학살의 크메르루주정권아래의 급박하고 험난한 상황에서 구해내기 위한 사투를 그린, 너무 가슴 아프고 또 지금까지도 몸에 소름이 돋는 내 인생의 첫 극장 영화였다.
내 생의 첫 영화관 영화이었는데, 그 모든 상황의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나에게는 정말 지금도 잊히지 않는 전쟁의 참상, 그리고 인간의 잔인함의 극치 그리고 생존에 대한 의지와 인권의 존엄성 그리고 주인공 프란의 파란 만장했던 생존과정등이 여전히 강렬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아메리카나|
청량리에 있었던"아메리카나"라는 곳에서 또 생애 처음 먹어본 밀크셰이크와 감자튀김은, 10대였었던 내가 난생처음 맛보는 색다른 조합이었지만, 정말 고급지고 맛있는 외국요리라고 생각했었다.
아직도 프렌치프라이는 좋아하지만, 설탕함량이 많아 좋아하지 않는 밀크셰이크 한잔에 그때의 나는 정말 감격스러움과 행복감 그리고 고급스러움을 느꼈었다.
유정이와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메리카나에서 이야기하다가, 그동안 선물과 간식들 너무 고마왔었다고, 왜 너라고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유정이는 깜짝 놀라며, 그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내가 같은 반 다른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으니, 다른 애가 준 게 아니겠냐고 물어보았다.
도대체 감이 아예 잡히지 않았다.
누구지 도대체 그럼 내 우렁이 친구는??
|어딘가 아픈 내 짝, 은성이|
월요일이 되어서 학교에 등교를 하였는데, 옆자리의 은성이는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주말에 나와 영화를 보았고, 아메리카나에 가서 맛있는 간식도 먹었다며, 유정이가 반 친구들한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영화가 너무 무섭고 참혹했었는데, 그것이 실화라서 너무 가슴이 아팠었다고 친구들과 이야기한 후에, 내 자리로 돌아왔고 곧 수업이 시작되는 그때에도 여전히 은성이는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처음에는 아침이니 잠이 덜 깼거나, 뭐 피곤할 수도 있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짝꿍인데 너무 무심한가 싶어서, 은성이의 엎드려 있던 어깨를 살짝 툭툭 치며, 괜찮은지 어디가 아픈지 아님 내가 도와 줄일 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은성이는 눈이 빨개지게 붓도록 엎드린 내내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이 아파서 양호실에 가겠다고 나가더니 다시 들어와서, 예쁜 핑크색 편지봉투를 건네고 도로 뛰어나가 버렸다.
아!! 그런데!! 왜 내가 몰랐었지?? 바로 옆에 내 짝꿍으로 앉아있었는데, 눈에 익은 은성이의 예쁜 손글씨!!!
바로 내게 누군가가 선물과 음료와 간식을 줄 때마다 쓰여져 있었던, 예쁘고 여자다운 손글씨가 바로 은성이었던 것이었다.
|은성이를 힘들게 한 게 나라니|
편지에는 그날 나와 수업이 끝난후에 학교뒤의 테니스코트가 있는 계단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하루종일 몸도 아픈 것 같고, 혹 무슨 내가 도와 줄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동안 너무 고맙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서 알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날 하루종일 수업 중의 은성이는 오후 내내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어서, 내가 혹시 무엇을 잘못했나, 왜 내게 화가 나있는 것 같지? 내가 착각한 것이겠지..라고 생각을 했었다.
드디어 은성이와 수업을 끝마치고 만났는데,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던 은성이는 어렵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유정이랑 영화를 보고, 밖에서 같이 간식도 먹으러 가서 하루종일 마음이 속상하고 힘들었었어"라고 이야기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혹은 상상했던 말이 아닌데?
왜 속이 상하고 힘들지?
나랑 은성이는 짝꿍이고 말하자면 친한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반 친구일 뿐인데 그리고 친구라 해도, 굳이 내가 다른 친구랑 영화를 본 게 왜???
내가 이해를 도통 못하는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쭈뼛거리고 있자, 은성이는 다시 포장지에 싸여 있는 작은 상자를 주고, 가방을 멘 채 먼저 뛰어가버렸다.
너무 황당무계했다. 또 억울했다. 매일 공부만 하다가, 모처럼 친구랑 영화 보고, 감자튀김에 밀크셰이크 먹고 온 내가 왜 내 반 짝꿍한테 무슨 큰 잘못을 해서 야단을 맞듯이 서 있어야 했었는지….
" 나 참 애가 특이하네, 조용하고 착한 줄 알았더니"
투덜대면서 다시 도서실로 걸어가면서, 은성이가 준 박스를 뜯어보았다.
|미미인형을 사랑했던 여고생|
어린 시절부터 짝퉁이 아닌, 진품의 마로니 인형을 참으로 갖고 싶었었던 나는, 고등학생이 된 나이에도 마로니 인형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고, 그 시절에는 업그레이드된 미미인형을 무척 가지고 싶다고 다른 친구들과 떠들었었던 적이 있었는데, 은성이가 포장해서 준 선물이 바로 나의 로망 그 오리지널 마로니의 “미미인형"이었다.
나는 순간 눈물이 나버렸다.
조용히 내 옆에 앉아서, 내가 더우면 시원한 콜라를, 추울 땐 핫 코코아를 그리고 내가 필요하거나 부러워하던 학용품을 선물해 주고 또 그렇게 어릴 적부터 가지고 싶어 했던 미미인형까지 기억했다가 선물을 해주다니....... 내가 뭐라고.... 은성이에겐 인사나 해준 게 다였는데... 너무 미안했다...
어떻게 고맙다 말을 해야 할지, 그런데 선물 상자 밑에 작은 카드가 있었다, 그 카드에는 그 당시 나도 좋아해서 자주 따라 보르고는 했던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
그대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
그대 바람 소릴 무척 좋아하나요
나는요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걸어요
외로운 내 가슴에 남몰래 다가와
사랑 심어 놓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나는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이미지: Pexel,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