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춘의 문장들이란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지금의 어른들도 다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나이를 지났음을 새삼 깨달았다. 문득 우리 엄마의 젊은 시절도 궁금해졌다. 엄마한테 “엄마는 어릴 때 어디서 살았어?”라고 물어보니까, 저 닫힌 질문 하나로 엄마가 더 신나서 거의 1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엄마는 아주 어릴 땐 경기도 연천군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74년 1호선이 개통하는 해, 초등학교 고학년 때 가족이 다 같이 서울 구로구로 이사했다. 엄마는 이 날이 포드 대통령이 방한한 날짜라고 하셨다. 세세하게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꽤나 생생한 기억일 듯하다. 서울로 이사 오고 나서 엄마의 부모님(즉 나에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되겠다)은 작은 구멍가게를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구멍가게를 하던 녹록지 않았을 이삼 년의 세월은 ‘잘 안됐지, 망했어’라는 한 마디로 압축되었다.
엄마의 집은 이때 크게 기울어서, 중학교 등록금을 제때 내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 담임 전병택 선생, (엄마는 저병태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필 그 성격이 고약해서, 등록금을 못 낸 엄마를 반 아이들 앞에서 일어나게 해 창피를 줬다고 한다. 검정고무신 만화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는 게 기억이 난다. 요즘 생각하면 정말 상상도 못 할 선생이다. 근데 엄마는 이때의 그 창피보다 집에 가서 할머니한테 돈 달라고 학교 안 간다고 땡깡 부렸던 게 더 생각나나 보다. 그때의 철없음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할머니의 잠 못 들었을 그 밤을 생각하면 나도 눈꺼풀이 찡해 눈알 한번 굴리게 된다.
이 날이 앞으로의 외할머니의 생에서 핵심 기억이 되지 않았을까. 그 후 외할머니는 포장마차를 하나 샀다고 한다. 그 당시 돈 20만 원. 엄마가 초년생일 때 한 달 월급 정도라고 했으니, 요즘의 최저시급으로 생각하면 200만 원 정도 될 거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여기서 공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잔치국수 같은 음식을 파셨다고 한다. 외할머니 솜씨가 좋았는지, 장사가 꽤나 잘됐다고 한다. 포장마차가 있는 땅 주인에게 매달 꽤 큰돈의 월세를 내면서도 이때부턴 엄마의 5남매 모두 등록금 걱정할 일은 없었다고 한다. 물론 마냥 순탄했던 건 아니다. 수도가 없어서 외할아버지가 근처 공장에 사정해서 물 받아오고, 몇 번 하다 그것도 안돼서 집까지 가서 물 받고 나르느라 고생을 엄청 하셨다고 했다. 또 이게 그 시절 포장마차라는 건 구청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여서, 심심하면 구청에서 철거반이 떠서 장사판을 다 망쳐 놓고, 울고 빌고 그러다 다음날 다시 장사 준비하고, 그런 날의 연속이라고 하셨다.
그러다 한 번은 또 철거반이 떴는데 웬걸, 외할머니의 초등학교 동창이 그 철거반 반장으로 온 게 아닌가? 외할머니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서울과 가장 멀다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올라오셨다. 이 먼 타지에서 둘이 만난 것도 신기한데, 20년도 전에 만났던 해남 초등학교 친구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이 두 분 사이도 꽤나 인상 깊은 스토리가 있을 것 같다. 먼 서울 타지에서 만난 해남 고향 친구에 대한 정으로, 나름 단속을 면하는 노하우(?)를 들어 그 후로는 철거반 걱정 없이 장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히려 구청의 정보를 통해 그 땅이 사실 사유지가 아니라 도로용지라는 것을 알게 되어, 땅주인이라고 속여 매달 월세를 뜯어가던 그 작자한테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일이 이렇게 잘 풀리기도 힘들다.
그렇게 20만 원의 작은 포장마차에서 시작한 장사로 엄마네 가족은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갈 수 있게 되었다. 마당 있는 집이라고 해서 요즘 상상되는 그런 집이 아니고, 딱 검정고무신 주인공 네 가족 집 같은 집이라고 했다. 마루를 가운데 두고 방 두 개가 마주 보고 있고, 마당 건너에 방하나, 주방 위에는 다락이 있었다고 했다. 마당 포함해서 30평 면적에, 집은 15평 정도라고 기억하셨다. 평수를 생각하면 방이 엄청 작을 거 같은데, 이것도 심지어 다른 방은 월세 주고 방 하나와 마루에서 가족들이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뭐 그래도, 이제 여러 걱정 덜고 살게 되었으니, 외할머니 부부께서 그 집을 처음 들어설 때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서울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준 포장마차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 있어 접게 되었는데, 거의 처음 살 때의 10배가 넘는 돈을 받고 파셨다고 한다. 엄마는 이걸 외할머니의 선견지명이라고 하셨다. 아마 20만 원에 그 수도도 없는 포장마차를 살 때 모두가 망설이지 않았을까, 그걸 사기로 결심한 외할머니의 그 단호함이 정말 대단하다.
바쁘게 장사하던 외할머니 부부에게 엄마는 꽤나 기특한 아이였을 것 같다. 중학교 때 전교에서 20등 정도? 반에서 1~2등 정도 했다고 하니, 그 당시 전교 인원이 지금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생각하면 엄마는 공부를 꽤나 잘했다. 엄마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은행원으로 취직이 잘되는 학교여서 꽤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라고 하셨다. 그 당시 중3 담임선생님께선 엄마에게 인문계 진학 후 교대를 가기를 추천했지만, 엄마는 빨리 졸업하고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근처에 대학교를 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랬던 거 같다고 했다. 세상이 넓다지만, 그 넓은 세상을 직접 봐야지 실감이 나는 법이다.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엄마는 조흥은행(지금의 신한은행)에 취직해서 20살 때부터 바쁘게 일을 하셨다. 내가 대학교에서 술판 벌이고 다니느라 바쁜 때에 엄마는 일을 시작하셨던 거다. 이때의 엄마가 뭐 내 20살 하고 많이 다르겠는가. 엄마는 대학 간 친구들이 풍기는 그 ‘대학생활’이라는 단어의 풋내가 궁금하고, 부러워졌다고 했다. 엄마도 분명 한강으로 소풍 간다든가, 옆 학교랑 미팅을 한다든가, 개강파티다 종강파티다 그런 것들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호기심반으로 은행을 다니던 와중에 학력고사를 봤다고 한다. 그런데 중학교 때 공부했던 게 남아있는지, 수학 같은 건 완전 기둥 세웠는데도 전체에서 반타작은 했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래서 가능성을 보고 학력고사 학원에 등록해서 점수를 올려서 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그 당시 같이 학력고사를 본 동생, 내가 김포 이모라고 부르는 이모가 “뭘 학원을 다녀~ 지금 그 성적으로도 전문대는 갈 수 있어~ 전문대 가자~”라고 의견을 냈다고 한다. 엄마도 은행일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생각하면 그게 낫겠다 싶어서 그러기로 했다. 엄마는 은행 일하느라 바빠서 원서 사는 것도, 원서 내는 것도 다 이모가 해줬다. 면접은 이모가 갈 수 없으니 엄마가 연차를 내고 갔다고 하는데, 면접 때 무엇을 물었는지 궁금해서 여쭤봤다니, 뭐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주 엉터리였다고 한다. 이모가 가도 될 정도로 허술했다고.
그렇게 엄마는 숭의 여전 도서관학과에 합격해서, 낮에는 은행 출근해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칼퇴근 중에도 칼퇴근을 해야 제때 갈 수 있어서, 유니폼을 최대한 빨리 갈아입기 위해 단추 있는 옷조차 안 입었다고 하셨다. 은행엔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하는 최종 정리 업무 담당이 있는데 이 담당은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했다. 엄마는 학기 중에 이걸 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지각이었다. 그래서 사정해서 방학 때 매일매일 그 담당하는 대신 학기 중에는 빼주는 식으로, 그렇게 학교를 다니셨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어쩌다가 대화가 다른 데로 샜는지 아니면 각자 일이 있어서 일어났는지, 이 날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엄마는 지금은 동네 중학교 사서 선생님으로 그렇게 고생하면서 다녔던 대학교 졸업장을 아주 톡톡히 써먹고 계시다. 나중에 엄마랑 같이 엄마가 살았던 동네 사진 찍으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