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애인과의 추억을 돌아볼 때, 이상하게 제일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
평소처럼 애인 집에서 놀고 있었다. 왠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저녁밥 때에 배가 안 고팠다. 아마 뭐 점심을 늦게 먹었거나, 그랬을 거다. 당연히 9시 즈음이 되니 슬슬 뭔가 먹고 싶다. 뭐를 시켜 먹을까, 나가서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나가 먹기로 했다. 내 옷을 챙겨 입기 귀찮아서 그냥 애인 슬리퍼 신고, 후드도 얻어 입고 나갔다. 근데 꼭 그런 날이 있다. 분명 배는 고픈데, 뭐 먹을지 아무리 고민해도 결정 못하겠는 날. 이 날이 그런 날이었다. 나만 그랬었는지, 애인도 그랬었는지, 자주 가던 샐러드 집, 샌드위치 집 다 패스. 한 번씩 가봤던 괜찮은 식당들도 다 패스.
그렇게 맞지 않는 슬리퍼와 후드를 입고 성신여대 번화가를 한 바퀴 싹 돌았다. 살짝 구석진 골목골목도 다 돌았다. 그래도 아직 뭐 먹을지 정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전에 한번 와보기로 했던 껍데기 집도 패스했다. 뭐 둘 다 짜증이 난 건 아니고, 사실 별로 배도 안 고팠던 거 같기도 하고, 안 먹어도 그만인 상태였을 거다. 핸드폰을 잠깐 봤다. 중학교 친구들 톡방에 카톡이 와있다. 무슨 양파를 볶아 넣어 짜짜로니를 해 먹으면 중국집 짜장면보다 맛있다는 둥 하는 카톡이었다. 이거 먹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카톡 보고 있으니까 궁금할까 봐 애인한테도 그 얘기를 해줬다. 그 얘기를 해준 게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집 앞 편의점에 들렸다. 짜짜로니와 인스턴트 떡볶이를 사서 들어왔다. 양파까지 볶아 먹는 건 귀찮았다. 그냥 먹었다. 애인이 떡볶이가 맛있다고 나중에도 사 먹을 거라 했다.
이게 이 기억의 끝이다. 그날 그렇게 나가기 전에 뭐했는지도 기억 안 나고, 그렇게 먹고 나서 뭐했는지도 하나도 기억 안 난다. 그냥 그렇게 나가서 동네 한 바퀴 돌고 들어와서 짜짜로니를 먹은 기억밖에 없다. 왜 이렇게 이 딱히 특별하지도 않은 에피소드만 기억에 남을까.
생각해봤다. 나의 뇌가 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따위도 아니고, 이별 후의 쓸쓸함 이런 것 때문도 아니다. 그 순간에 나는 살아있었다. 사실 뭐라 표현할지 어렵고 귀찮아서 그냥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할까 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르다. 행복이 바닷가에서의 서머 브리즈처럼 그 순간에 바로 느끼는 거라면. 나의 이 짜짜로니 메모리는 그 순간엔 못 느꼈지만,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아 그때 참 좋았지” 이러는 것과 비슷하다.
신은 죽었기에 이제 너만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저 이야기도, 저 이야기 속 상황도 다른 이들에겐 가치 없다. 오직 나에게만 가치 있다. 내가 가치 있어하는 것들이 나를 설명한다. 안 맞는 슬리퍼에 후드를 입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런 조각의 기억들이 나를 구성한다. 이 기억이 가진 가치? 한 겹의 가면도 없이 내추럴한 나와, 그렇게 마주할 수 있었던 관계와, 추억이 담긴 익숙한 동네 등등 아닐까.
그냥 문득문득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 속에 들어있는 가치가 뭔지 생각해보자. 짜짜로니로 시작해서 니체로 끝나는 기묘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