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2018
요즘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올림픽을 다시한번 직접 볼 수 있을까? 올림픽 현장에서 일을 하는건? 그럼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IOC에서 하는 주관대회가 그게 뭐든 다시한번 보고 관련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그런데 마치 나의 아쉬움을 아는지 평창에 다시한번 올림픽 성화가 타오르고 있다. 올림픽인것도 맞고.IOC주관대회도 맞다. 단 올림픽 앞에 청소년이라는 말이 붙을 뿐. 그렇다. 흔히 말하는 유스올림픽이 강원도 일대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이다. 6년전 평창과 강등 일원에서 에서 봤던 그 종목들이 그 경기장에서 열린다.
이런 이유로 나의 생각은 요즘 6년전으로 거슬러 가 있을 때가 많다. 돌이켜보면 일로도 내 인생으로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재수를 하고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인서울 공대를 갔고, 그래서 매일 아침밥을 챙겨주던 엄마의 의무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대학생 엄마가 됐던 2018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출장으로 2년마다 해외를 다니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종합대회 출장은 졸업을 한 줄 알았던 그때였다. 이젠 내게 경기를 원없이 보고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그걸 거의 라이브에 가깝게 전하는 짜릿함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구나 하며 실망하기도 했던 그때, 평창올림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방송단이 급하게 꾸려졌다. 방송국이 파업으로 방송단을 파견하냐 마냐 하다 급하게 가는 쪽으로 정해지면서 윗선에서 리포터를 구하라는 연락이 왔었다. 스포츠작가도 찾기 힘들지만 스포츠리포터는 더 희소한 이 바닥에서 그것도 거의 3주 정도를 현지에서 상주해야하는 리포터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겐 스포츠 현장을 사랑하는 믿음직한 두명의 후배가 있었다. 경기장을 모두 드나들 수 있는 AD카드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하필 믿음직한 후배 중 한명이 유럽여행을 떠나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본인의 핸드폰은 간간히 사용하고 동행인의 핸드폰을 주로 사용하면서 연락이 안됐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동행인을 수소문해서 연락을 했고, 그 친구는 숙소 벽에 서서 찍은 AD카드용 사진을 내게 보내왔다. 그렇게 우리는 진행자1, 피디2, 기술진2, 작가1로 방송단을 꾸려서 평창IBC (국제방송센터)로 갔다.
방송장비와 자료, 3주동안 지내면서 입고 쓰고 해야할 짐들이 담긴 캐리어들을 중계차에 싣고 우리는 평창으로 향했다. 가는 길을 설렜지만 그 셀렘도 첫 휴게소에 맞이한 바람과 추위에 곧바로 걱정으로 변하고 그렇게 우리 방송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일정을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시작했다. 나는 올림픽 방송을 하러 가면 지키는 루틴이 있다. 일단 IBC의 우리 자리를 찾아 프린트를 세팅하고 AD카드에 각종 연락처를 프린트해서 투명테이프로 붙여놓는다. 방송단 구성원, 해설위원, 아나운서, 기자 등등의 연락처는 가끔 핸드폰으로 찾는 것보다 언제나 목에 걸려있는 AD카드가 비상상황에서는 요긴하다는 걸 경험상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IBC와 프레스센터 투어에 나선다. 여러 스폰서 부스도 들러보고, 프레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친한 기자들을 만나 짧은 회포도 푼다. 친하다고 하지만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갖지 않기때문에 종합대회는 내게 나의 네크워크를 관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방송도 부탁하면서 방송단과 기자단을 위한 어떤 시설들이 있는지를 스캔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일찍 대회 굿즈를 산다. 이것도 경험상 인기가 있는 품목들은 바로 품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다. 평창에서는 수호랑과 반다비 캐릭터가 인기가 많아 사고 싶은 것들을 못샀던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올림픽을 가면 시계를 산다. 올림픽은 스왓치 시계가 굿즈로 만들어지고 있던 시절이라 대회 내내 착용해도 좋고 그 이후에도 활용도가 높았다. 그 무엇보다 내가 올림픽에서 뭔가를 했다는 의미가 담겼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 시계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수호랑과 반다비는 아직도 우리 집 장식장 한켠을 차지하고 있고, 종목별 나왔던 마그네틱 기념품도 한 장소에 잘 붙어있다. 그리고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갈때 메고 가는 가방에도 반다비 수호랑의 배지가 달려있다. 하루에 3, 4시간만 자며 일했어도 즐거웠다. 새벽까지 일을 하고 평창 숙소에서 휘닉스파크로 달려가 이상호의 스노보드 경기를 봤고 마지막날 컬링 결승을 보고 싶어서 폐막다큐를 밤세워 만들고 한숨도 못자고 경기장에갔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내가 역사의 한 자락 그 어딘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뿌듯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88올림픽은 대학생으로, 2002 월드컵은 리포터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작가로 그렇게 현장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꿈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평창에서 또 하나의 꿈이 시작된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보면서 올림픽을 꿈꿨던 어린이가 평창에서 올림픽을 꿈을 이루고 2년 후 2026 동계올림픽을 향한 목표에 한걸음 다가갈 것이다. 그들의 꿈을 직접 현장에서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강릉행 주말 KTX 표를 검색했지만 여의치가 않다. 그래서 방송에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무료이니 가서 우리 꿈나무를 응원해달라고. 이번엔 그걸로 내 역할에 만족해야겠다.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