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월 1일에 쿠바혁명은 성공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바티스타 대통령이 쿠바를 급히 탈출하여 권력의 공백이 생긴 하바나에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혁명군이 입성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을 잡았던 바티스타 대통령과 그 일가의 부패가 극에 달했고 이로 인해 쿠바의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갔었다. 하바나에 세워진 고급스러운 건물, 수입된 호화 승용차들, 아름다운 해변에 세워진 호텔, 고급 리조트 및 저택들은 소수의 쿠바인 상위계층과 쿠바에 투자한 미국사업가와 그 가족들의 전유물이었을 뿐이었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궁핍하였다. 혁명에서 성공한 후 혁명의 취지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카스트로는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미국 자본가들과 쿠바의 소수 상위계층에 대부분 소유되어 있었던 토지들을 쿠바의 일반 농민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사업가들이 소유했던 쿠바의 토지들이 아무런 보상 없이 몰수되었고, 이러한 외국자본의 국유화 과정은 호텔, 저택 등의 부동산으로도 확대되었으며 쿠바에 있던 금융자산 등의 동산들도 포함되게 되었다. 반세기 넘게 쿠바 전역에 막대한 사탕수수 농장 등을 소유하고 있었던 미국인 지주들과 미국인들의 휴양지로 되었던 쿠바에 투자해 왔던 미국인 사업가들로서는 하루아침에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므로 엄청나게 큰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2년 후인 1961년에는 미국과 국교가 단절되어 버렸다. 이 시기에 재산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쿠바인들과 외국인들이 쿠바를 떠나게 되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헤밍웨이도 쿠바에서 몇 십 년을 살며 유명한 소설인 '노인과 바다' 등을 집필하였지만 결국 쿠바를 떠나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이러한 쿠바 탈출 움직임들에 대하여 '새로운 조국이 싫으면 쿠바를 떠나라!' 라고 말하며 쿠바인 부자들의 미국행을 무력으로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음악가들에게도 일어나게 되었다. 1930~1950년대 쿠바 음악의 발전과 특히 1950년대 쿠바 음악의 황금기는 쿠바가 관광 사업으로 호황을 누렸던 점에도 관계가 있었다. 1920년대까지의 쿠바 음악은 어느 정도 쿠바의 전통 음악적 요소가 지켜져 온 반면에, 1930년부터는 쿠바로 밀려들어온 미국 자본의 영향으로 하바나가 미국인의 관광지로 호황을 누려 오며 호텔사업, 유흥사업 등이 성장하였으므로 음악도 이러한 자본의 영향과 미국 관광객을 위하여 쿠바음악은 그 정통성을 서서히 상실하였던 면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카스트로 혁명 정부는 혁명 이전에 황금기를 누렸던 쿠바 음악을 부르주아적 성격을 가진 음악으로 분류해 버렸고, 쿠바의 서민적인 정통 음악이었던 룸바 음악 정도만을 인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카스트로는 '쿠바는 룸바이고, 룸바는 쿠바이다. 룸바가 없으면 쿠바가 없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실력 있는 많은 쿠바 음악가들이 조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 음악가들은 이후 미국의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를 하게 되었지만, 쿠바로서는 음악적으로 많은 인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195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쿠바 가수인 '베니 모레'는 미국행을 선택하지 않고 조국인 쿠바에 남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 이후로 급격하게 나빠지는 상황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는 술에 의존하여 보내다가 결국 몇 년 후에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마리아는 명학이 세상을 떠나고 난 이후에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자, 쿠바혁명 이후에 음악인들에게 일어날 변화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과 쎌리아는 조국을 떠나지 않더라도 음악재능이 넘쳐나며 젊은 안토니오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눈물을 머금고 미국으로 보내야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던 로드리게스 씨와 정기적으로 편지로 소식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안토니오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정착한 이후에는 쿠바 음악인들이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쿠바 음악가들의 많은 수가 미국 진출 초기에 그의 신세를 졌고 후원을 받아 왔었다.
안토니오가 탄 여객선은 마이애미에 도착하였고, 길게 늘어선 줄에 끼여서 몇 시간을 움직이다가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겨우 통과하였다. 깐깐해 보이는 미국 공무원의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고, 인터뷰 과정에서 하마터면 다시 쿠바로 돌아가야 할 상황까지 왔으나, 그에게 로드리게스의 편지를 보여 주었고, 안토니오의 미국 정착과정을 책임지겠다고 적혀 있는 로드리게스의 편지 내용과 그의 미국 주소가 적혀 있는 편지봉투를 보고 난 후 입국허가 도장을 찍어주게 되었다. 쿠바를 떠나기 전에 마리아로부터 배웠던 영어도 도움이 되었다. 미국 땅을 처음 밟았던 그는 벅찬 감동보다는 씁쓸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 저 너머로 조국인 쿠바가 있었고, 그 곳에는 보고 싶은 어머니와 그리고 자기를 아들처럼 챙겨주신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 섰다. 그리고는 마이애미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마이애미의 허름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에 시외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정거장 안은 미국의 각지로 떠나려는 승객들과 버스로 가득차 있었다.
"뉴욕행 편도 일반버스 한 장 주세요!"
그는 조심스럽게 영어로 매표소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매표소 직원은 그의 형편없는 영어 발음을 자연스럽게 이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수많은 쿠바인 이민자들이 여기를 거쳐 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돈을 건네고 받은 뉴욕행 표를 들고 시외버스로 향했다. 마치 점프를 하듯이 달리려는 모습을 하고 있는 날씬한 개 한마리가 버스의 옆면에 그려진 버스에 올랐다. 미국전역을 그물망처럼 연결해 주고 있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였다. 버스는 드디어 출발하였고, 2시간 간격으로 휴게소에 정차를 하였다. 이제 다음에는 도착할 것 같았지만 버스는 쉬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미국은 엄청 땅이 넓은 모양이구나. 이 정도 시간과 거리였으면 쿠바라면 벌써 쿠바의 끝에서 끝까지 도착하였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고 마이애미를 떠났으나, 다음 날 밤늦게 뉴욕에 겨우 도착을 하게 되었다. 하룻밤은 어느 작은 도시의 허름한 모텔에서 또 밤을 보내야만 했었다. 큼직한 트렁크 가방을 들고 외롭게 그레이하운드 버스에서 내렸다. 마이애미와 비교해서 날씨가 쌀쌀하다는 것을 깨닫고 안토니오는 트렁크에서 코트를 꺼내서 입었다. 장시간 버스에 있었기 때문에 온 몸이 욱신거렸다. 천천히 걸어서 시외버스 정거장을 나왔다. 이미 어두워진 뉴욕의 거리에 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거리를 달리고 있는 차들의 전조등도 그의 눈을 또 부시게 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고층건물의 스카이라인과 근처의 화려한 광고판들은 그의 기를 죽였다. 정말 엄청나게 큰 도시일거라고 예측이 되었고, 하바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제도시라고 생각이 들었다. 남은 돈이 얼마인지를 생각하며 택시를 탈 수 있을까 계산을 하다가 문득 멈추었다. '이 늦은 시간에 로드리게스 씨를 찾아 간다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쓰잔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일단 무작정 걷기로 하였다. 한 시간 정도를 걷으니까 머리는 맑아져 왔지만 다리가 아파 왔다. 그래서 거리의 한 구석에 앉았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마음은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늘밤은 불가피하게 뉴욕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하였고, 주위를 들러 보아도 그가 거처할 수 있는 모텔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근처에서 두꺼운 종이를 구해서 자리에 펴고 트렁크 가방을 베게 삼아서 자리에 누웠다. 뉴욕의 첫날이 노숙이어서 신세가 처량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누워서 본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 뉴욕은 세계 각국에서 음악인들이 몰려 드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음악가들 사이에서 엄청 경쟁이 치열할 텐데...'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봉수가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안토니오야. 아빠는 몇 십 년 동안 엄청나게 고생을 하며 살아 왔어. 원래 조국이었던 꼬레아를 떠나서 멕시코를 거치며 쿠바까지 오는 동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해야만 했어. 그런데, 아빠가 죽지 않고 버티게 한 것은 음악이었다. 안드레아 삼촌도 같이 한 시간들이었지. 언젠가 인생에 한번은 꽃이 피게 되어 있어. 그 순간을 위해 절대 포기하거나 또한 일이 잘 안된다고 낙담하여 그냥 막 살면 안 되는 거야."
아버지인 미구엘과 안드레아 삼촌은 젊은 시절 조국을 떠나서 멕시코 등을 거치면서 새로운 음악을 배웠고, 다시 쿠바에 와서도 또 다른 새로운 음악을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해진 음악가들은 아니었지만, 서로 다른 대륙들의 음악을 소화해 낼 수 있었던 진정한 음악의 거장들이었다고 안토니오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과 역경을 생각하면,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이 숙연해져 왔다. 그러다가 졸린 눈을 참지 못하고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 후에 근처에서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골목길 한 모퉁이에서 철로 만든 트렁크 통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장작을 피워 놓고 사람들이 모여 불을 쬐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흑인들의 영가풍의 노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장르로 굳이 분류하자면 리듬앤블루스에 속할 수 있다고 느껴졌다.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이들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제법 들을 만 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미국 흑인 특유의 애환이 듬뿍 담긴 느린 멜로디를 이어 나가면서 5~6명이 모닥불 주위로 서서 노래를 연속하여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멜로디를 오랫동안 듣다 보니 어느새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미국 흑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뉴욕의 첫날 아침을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아침이 되어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안토니오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머리와 옷깃을 다시 정리하고 가방을 들었다. 밤새 노래를 부르던 흑인들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고, 그들이 피워 놓았던 장작의 재만이 트렁크 통 속에서 희미한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굿모닝! 뉴욕!'이라는 말이 그의 입 밖으로 나왔다. 그도 자신이 내뱉은 뜻밖의 말에 웃음이 나왔고, 밝아진 기분에 힘을 입고 거리를 걷기 시작하였다.
"로드리게스씨. 안토니오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쿠바 하바나에서 왔다고 하네요. 로드리게스 씨가 이전에 보내신 편지도 들고 왔네요."
비서는 로드리게스의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 알려 주었다.
"안토니오? 아. 들어오라고 하세요."
안토니오는 여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뚱뚱한 체격을 가진 흑인 노인이 검은 안경을 낀 채 자리에 서 있었다.
"어세 오게! 나는 로드리게스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로드리게스씨. 저는 안토니오라고 합니다. 마리아 씨가 미국에 가면 선생님을 꼭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편지도 주셨습니다."
로드리게스는 편지를 건네받았다.
"조금 전에 내 비서가 이 편지를 확인 해 줬어. 내가 마리아에게 쓴 편지라네. 마리아가 자네를 부탁한다고 하더군. 아주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라고 말이야."
둘은 앉아서 한참을 얘기를 나누었다. 둘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쿠바에 대해서 로드리게스가 묻고 안토니오가 답하는 내용이었다.
"미구엘과 안드레아는 훌륭한 음악가들이었다. 그들이 몇 년 전에 죽었다는 것은 마리아의 편지로 알고는 있었지. 그 소식을 듣고 내 마음은 몹시 아팠어. 그 분들의 나라였던 꼬레아의 음악과 그리고 멕시코 음악, 우리 쿠바 음악을 모두 소화를 해내었던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음악인들이었어. 세상이 그들의 그러한 재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어쩌면 아직 안되었을 수 있지만, 나는 그 사람들을 마딴사스에서 처음 봤을 때 나의 귀와 영혼이 그 점을 볼 수가 있었다네.. 아마 내가 장님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당시 그들에게서 나오고 있는 음악의 혼이 느껴졌었어. 믿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음. 자네의 어머니인 쎌리아씨는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실력 있는 가수였을 거라고 생각하네. 또 말이야..마리아는 정말 아까운 가수였어. 옛날에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아마 유명해졌을 거야. 쿠바음악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여자였어."
로드리게스는 안토니오로부터 그가 지난 시절 알고 지냈던 음악인들의 살아온 시간들을 들으면서 감회가 깊어졌다. 이후에 안토니오는 로드리게스가 운영하는 밴드들과 같이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뉴욕의 허름한 방에서 외롭게 생활을 하였지만,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에서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담아 쿠바에 있는 어머니와 마리아에게 편지를 한 번씩 보내면서 그의 뉴욕생활을 그녀들에게 알려 줄 수 있었다. 이제는 노년이 되어버린 로드리게스는 마지막 작품을 만들어 내 듯이 안토니오를 음악적으로 키워나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오랜 음악적 경험을 통해 나오는 살아 있는 지식들과 기술들이 그의 피아노 연주를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으로 인해 쿠바음악이 세계 음반시장에서 사라져 버리자, 영미 음악인 로크 롤과 같은 음악들이 대중 음악시장을 더 잠식해 버렸다. 비틀즈의 미국진출은 '브리티시 인베이젼'(영국의 미국 침공)으로 언론에 특필되며 이제는 쿠바음악이 아닌 영미 대중음악으로의 세대교체를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그렇다고 로큰롤 음악으로 전향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영혼은 쿠바음악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신에 그는 라틴재즈 장르로 전문분야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밴드와 같이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시간을 내어 작곡을 시작하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작곡한 곡이 알려지며 다른 연주자들도 무대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해 주고 있었다. 로드리게스의 후원 덕분에 그가 작곡한 앨범이 미국시장에 나오게 되었으며 점점 더 그의 명성이 알려져 가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 미국을 휩쓸었던 맘보열풍은 1960년대가 되자 점차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쿠바 음악인들이 더 이상 미국으로 오기 힘들게 되자, 라틴음악 시장을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음악가들이 점점 차지하게 되었다. 안토니오도 이러한 경향과 어울려 푸에르토리코 음악가들과의 교류가 잦아졌으며 그들과 앨범 제작을 하는 기회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뉴욕은 미국 흑인들의 재즈음악의 엄청난 저장소였고, 그들 특유의 알엔비, 소울과 같은 장르의 음악들은 세상에 더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뉴욕에 쿠바음악인들과 푸에르토리코 음악인들이 들어와서 쿠바 음악적 색채가 강한 손 몬투노, 맘보에 기반을 둔 라틴음악은 알앤비, 소울과 접목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맘보, 차차차에 이어 1960년대에는 '부갈루'라는 장르의 라틴 음악이 탄생되게 되었다. 미국 흑인 음악인 알앤비, 소울 등이 쿠바 흑인 음악인 손 몬투노, 룸바, 맘보 등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부갈루'라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박수소리와 같이 흥겹게 들리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음악이었다. 안토니오도 이러한 부갈루 음악제작에 참여하며 여러 곡들이 대중매체를 타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틀면 자주 들었던 음악 중에 하나가 'I like it like that'(그대로가 좋아!)이었다.
이러한 부갈루 음악의 열풍은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그 인기를 톡톡히 누리다가 1970년대가 되어서는 '살사'라는 음악과 춤으로 변신이 되었다. 쿠바 음악의 손 몬투노, 룸바, 맘보가 부갈루를 거치며 새롭게 다시 옷을 갈아 입고 나온 것이었다. 살사음악과 춤은 이후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라틴 음악들이 그 동안 중남미 출신의 스페인어권 사람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파니아 올 스타즈'라는 유명한 살사음악 가수들의 연합체적 밴드가 생겨나면서 그 파급효과는 더욱 커져 버렸다.
1975년에 뉴욕의 양키 스태디움을 5만여 관중이 가득 채우게 되는 '파니아 올 스타즈'의 대규모 콘서트가 개최되는 일이 있어 났는데, 이 콘서트를 계기로 미국언론들도 라틴음악을 미국의 주류 대중문화의 하나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안토니오도 파니아 올 스타즈의 양키 스타디움 콘서트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엄청난 콘서트에 참여한 자리에서 조국인 쿠바를 생각하였고, 지금은 연락조차 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인 쎌리아 그리고 마리아, 아버지인 봉수와 명학, 미국에서 도움을 주신 로드리게스 씨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여러 곡들이 연주되는 가운데서, 그가 제작에 일부 참여하였던, 'Quitate Tu Pa Pnerme Yo'(비켜요. 내가 당신의 자리를 차지하게요)가 울려 퍼졌고, 5만 명의 살사 음악팬들은 그 노래를 일제히 따라 부르고 있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안토니오는 1978년에 한국계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였다. 뉴욕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우연히 그의 작곡에 참여하였는데, 그녀가 한국인 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에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음 해에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약 70년 전에 조선에서 멕시코로 노동을 하러 왔다가 노동계약기간이 끝나고 고생 끝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을 수가 있었다.
1980년이 되자, 그는 부인과 같이 대한민국을 찾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밴드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군인들을 위한 콘서트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 겸사겸사 시간을 내어 한국을 여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콘서트가 모두 끝나고 밴드의 단원들은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지만, 안토니오와 그의 부인은 서울에 계속 남아 있었다. 호텔에서 그는 초조하게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안토니오씨! 마침 호텔에 계셨군요. 알아보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명학이라고 하는 사람의 남아 있는 그의 가족은 찾을 수 있었는데, 안토니오씨의 부친이 되시는 봉수라는 분은 지금으로서는 가족들의 행방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 분도 저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니 애석하기는 하지만, 저희도 한국에 계속 남아 있을 수가 없으니까 찾으셨다고 하는 가족들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승용차로 찾아 가 보도록 제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안토니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국에 오기 전에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던 미국인에게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던 것이었고, 부탁을 받은 그 사람은 여러 정보망을 통하여 명학의 가족을 찾아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안토니오 부부는 승용차를 타고 충청도의 어느 지방으로 내려갔다. 한국인 운전사는 영어를 잘 할 줄 알았고, 미리 연락을 해 둔 어느 집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그 집에 들어가니 백발이 성성한 어느 한국인 할머니와 그녀의 가족들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 할머니는 명학의 여동생이라고 하였다. 이미 아흔을 넘긴 나이였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노쇠하였으나, 통역하는 운전사를 통해 안토니오가 그 동안 명학이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오랜 설명이 끝나자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가족들은 안토니오 부부를 어느 무덤가로 안내해 주었다. 명학의 부모님이 묻혀 있는 곳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그는 옷 속에서 소중히 지니고 있던 누런 종이를 꺼내어 비석 앞에 놓아두었다. 명학이 조선을 떠나 멕시코로 갔을 때 사용한 조선의 여권이었다. '이제는 안드레아씨의 고향에서 편하게 쉬세요..."라고 말을 하였다. 봉수의 여권도 명학의 여권 옆에 같이 놓아두었다. '아버지. 당신의 가족들과 고향을 찾아 주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사죄를 하였다. 한국인 가족들은 이러한 설명을 듣고 안토니오에게 오래된 여권 두 장을 건네받았다.
"이제는 두 분이 한국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 여권들도 한국에 계신 분들이 간직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안토니오의 말을 운전사는 그대로 통역을 해 주었고, 가족들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명학과 봉수의 영혼은 고향의 하늘 위로 올라가서 한 바퀴를 돈 후에 다시 태평양의 물결을 수놓으며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