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공항에서 국제선을 타고 와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다시 14시간을 논스톱으로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날아온 여정이 오십이 넘은 나에게 힘들었다. 경유를 하지는 않아서 고생은 덜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한동안 한국음식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두 번의 기내식은 모두 매운 한국식사를 선택했다.
두 편의 영화와 수십 곡의 음악을 듣고 몽롱한 상태에 있었는데 비행기는 어느새 이스탄불의 하늘을 거치며 유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객실칸에 불이 켜지며 승무원들은 마지막 식사준비와 착륙까지의 2~3시간을 진행시키기 위해 바빠지기 시작하는 듯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나는 여행용 스페인어 포켓형 책을 들고 필요한 표현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옆 좌석에 앉은 스페인 여자분이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신기한 듯이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말을 걸어 볼까 하다가 실전 스페인어에 자신이 없어서 이내 단념하였다. 2020년 4월에 쿠바로 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 예약까지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것이 취소가 되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스페인어 독학을 시작했고, 중남미의 라틴 음악이 좋아서 노래가사를 외우려고 한 것이 동기가 되어서 지금까지 느리지만 스페인어를 공부한다. 초급책은 독학으로 한 권 완독 하였지만 혼자서 한 공부라서 많이 부족할 것이다.
대학생 딸이 스페인의 로욜라 대학 코르도바 캠퍼스에서 올해 가을부터 일 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영어로 강의가 이루어지며 세계각지에서 온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 감각을 키울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는 장점이 딸의 장래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까다로운 학생비자취득 과정을 몇 달 동안 도와주다가 출국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나도 딸과 같이 스페인에 가서 짐도 들어주고 초기 정착까지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큰 결심을 하고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의 스페인 여행은 갑자기 찾아오게 되었다.
출국하기 며칠 전에 나는 치루 수술을 받고 온 터라서 몇 시간 넘게 앉아 있는 것도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출국 전에 병원에 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수술한 의사께서 걱정을 하셨지만 이주일치 약처방을 해 주셨다. 앞으로 2주일의 일정에 아무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다행히 수술한 부위는 잘 아물어 가는 것 같다. 바라하스 국제공항에 마침내 도착하여 짐을 찾고 나가니, 호텔까지 이동을 위해 미리 예약한 택시 기사분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에 내 이름을 적은 것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인분이셨는데, 자기 택시가 현대 아이오닉 전기차라며 한국사람들 만든 차가 좋다며 일부러 자랑을 해 주셨다. 영어가 안 되어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는데, 나의 부족한 스페인어를 잘 이해해 주시고 유용한 표현까지 가르쳐 주셨다.
어느덧 택시는 호텔 앞에 도착했고,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그 특유한 유럽식 올드 스타일의 이중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도착했다. 딸이 수강신청이 급한지 노트북을 꺼내서 두 시간 넘게 온라인으로 고생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딸과 함께 호텔을 나와서 인근의 마드리드 왕궁, 솔광장, 마요르 광장 들을 도보로 구경해 보았다. 시차 때문인지 피곤하여 1시간 넘게 구경하고 간단히 요기를 하고 들어와 버렸다. 스페인은 여름에 날씨가 더워서 그러지 밤에 산책하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아무튼 내일은 솔광장 가서 유심도 사고 아토차 역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는 코르도바행 고속열차를 타야 하는 일정으로 바쁠 것이다. 오늘 첫 일정이 무사히 끝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마드리드에서 하룻밤 지낸 호텔에서 체크 아웃 하고 짐을 맡기고 나왔다. 다행히 도심 관광지에서 십분 거리에 호텔을 정했기 때문에 가려고 하는 솔광장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솔광장에는 곰이 나무 위에 있는 딸기를 먹으려고 나무를 잡고 서 있는 동상이 있는데, 거기에 유심을 파는 Vodafone 통신사 매장이 있었다. 유심을 사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한데, 최근에 나온 전자여권은 기계에서 인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있는 Orange 통신사 매장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직원들이 친절하고 영어도 잘하였다. 나와 딸 모두 월 20유로에 100기가 서비스 유심을 구입하였다. 나는 월 서비스를 구매할 필요가 없었지만, 보름 사용하는 서비스가 25유로여서 더 비싸기 때문에 한 달 20유로를 구매하였다.
기차 타러 가기 전까지 한 시간 반 정도가 남아서, 딸과 함께 초콜릿 찍어 먹는 추러스 카페도 가보고, 젤라토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여유롭게 도심거리를 산책하였다. 스페인 브랜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류매장들도 같이 구경해 보고 마요르 광장까지도 걸어 보았다. 36도 정도를 바라보며 올라가는 기온이어서 광장의 태양 아래에서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니 무더웠다. 다행히 습도가 낮은 더위여서 불쾌하지는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서 짐을 찾아 거리로 내려오니, 이사 가는 가족의 모습 그대로다. 커다란 짐가방 세 개와 함께 딸은 가방을 메고 있고, 나는 등산용 배낭을 멘 여행자의 모습이다. 피난민과 여행자는 겉보기에는 비슷할 것 같다. 단지 다른 것은 마음가짐일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우버 앱을 사용하여 택시를 불렀다. 하지만 근처에 다가온 택시를 우버 콜로 온 택시로 착각하고 타 버렸다. 이상하다 싶어, 아토차 역으로 타고 가는 도중에 기사에게 물어보니, 이 차는 우버 택시가 아니고 리브레(Libre)라고 한다. 그냥 길에서 잡아 타는 택시를 말한다. 모르고 탄 내가 잘못이지, 기사를 탓할 수 있으랴? 우버 취소 수수료 4.5유로와 함께 내가 탄 택시 요금도 10유로 조금 넘게 나온 것 같다. 속이 쓰렸지만, 딸 앞에서 애써 멋있는 아빠의 모습을 유지하였다.
마드리드의 아토차 역에서는 아베, 이르요 같은 고속열차들이 스페인 전 지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우리가 타는 고속열차는 이르요(iryo)인데, 세비야(Sevilla)를 종착역으로 달리며 우리의 목적지인 코르도바(Cordoba)에만 딱 한번 정차하는 노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KTX 타는 것과는 다르게 스페인에서는 공항 검색대와 같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였다. 그리고 플랫폼에 내려가기 전에는 줄을 서서 표검사를 받는다. 이런 점 때문에 열차 출발 시간 최소 삼십 분 전에는 역에 도착해야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는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여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자. 이제 마드리드에 작별을 고하고 딸이 공부하게 될 코르도바를 향해 두 시간을 고속열차로 이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