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한 해를 정리하는 이야기
미친 척하고 휴직을 해버린 올해, 그동안 나와 가족이 쌓아온 항공사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좌석을 프레스티지/비즈니스로 승급해서 여행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좌석을 승급해서 여행했는데, 우리 나라의 대표 항공사 2곳을 2번씩 이용했다.
'세상에 내 인생에 비즈니스라니...'
비행 전 설레는 마음으로 각 항공사의 비즈니스석 유투브 영상을 몇 개나 봤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여러번 조사하듯 미리 만나본 프레스티지/비즈니스석이지만 실제로 탑승을 했을 때의 그 느낌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탑승 수속을 할 때부터 느낌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탑승 수속과 수화물을 보내기 위해 긴 줄을 설 필요가 없었고 탑승 전까지 전용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등 예상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비행기에 탑승할 때에도 비즈니스석 이상 탑승객은 별도의 출입구를 통해 탑승할 수 있었고, 매우 편안한 좌석과 제공되는 기내식, 비행 중 사용하도록 제공되는 어메니티가 기분 좋고 편안한 비행을 하도록 도와준다.
* 세상에, 이런 믿지 못할 경험을 사진으로 남겼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부끄러웠다.
새삼 사진과 영상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분들이 존경스럽기까지...
이러한 비즈니스석 이상의 탑승객에 대해 두 항공사는 닮은 것처럼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 항공사는 더 많은 고객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는데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항공사가 독점 형태가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한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경쟁 구도이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경쟁이 결코 나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두 항공사가 합병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다.
다시 야이기로 돌아와서... 올해 몇 차례 비행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이 있는데, 앞으로 여행을 떠날 때 어느 항공사와 함께 할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특정 항공사를 선택할 것 같다. 물론 항공사 브랜드에 따라서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고, 내가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따로 있었다.
앞서 설명했지만 두 항공사는 닮은 듯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편안하고 넓은 비행기 좌석
- 승무원들의 친절한 서비스
- 담요, 쿠션, 그리고 슬리퍼
- 품질 좋은 어메니티
어느 것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어느 항공사를 선택하든 특별한 경험을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두 항공사가 비슷하게 제공하는 것들은 나의 최종 선택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있지만, 누구에게는 없는 것의 차이가 결정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결국 어메니티 품목의 차이였단 것이다. 항공사별로 어메니티는 비행하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용품이 제공되는데, 칫솔/치약, 안대, 화장품, 빗이 공통적으로 제공되고 다른 품목은 항공사별로 달랐다.
A 항공사는 구둣주걱을, B 항공사는 휴지, 양말, 귀마개를 제공하고 있어 구성품 차이가 있었다. 제공되는 용품의 브랜드가 어느 항공사의 것이 더 우수한지는 나는 잘 모르고, 사실 전부 훌륭했기에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어메니티에서 항공사별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결국 이 차이가 내가 앞으로 비행을 할 때 어떤 항공사를 선택할지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구둣주걱을 제공한 A 항공사가 더 좋게 느껴졌다. 왜일까?
비행 중에는 기내 압력이 지상의 압력에 비해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신체는 팽창하려 하고, 결과적으로 몸이 살짝 붓게 된다. 신발끈을 꽉 묶은 운동화를 신으면 5시간만 비행을 해도 붓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나는 탑승 후 자리에 앉게 되면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비행기는 이륙을 하고 기내식을 먹고, 양치를 하고 손을 씻는다. 그리고 영화나 책을 보거나 잠을 잔다. 그렇게 수 시간이 흐른 뒤 비행기는 착륙하게 되고 이제는 내릴 준비를 하게 된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벗었던 신발로 다시 갈아 신는다. 이러한 과정이 나의 비행 루틴이고 어느 노선이든 큰 변화는 없다. 이러한 비행 루틴 동안, 항공사에서 제공한 어메니티는 매우 유용하다. 칫솔, 치약이 있어 양치가 가능하고 씻은 후 로션을 바를 수 있고 립밤도 때로는 사용한다.
그러나 그 외 제공되는 품목들은 나의 비행 루틴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비행 중에는 대부분 기내는 어둡게 빛이 조정이 되기 때문에 안대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비행기 소음이나 주변 소음은 자는데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아서 귀마개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대머리라 빗은 의미가 없는 물건이다. 휴지를 사용할 일은 다행히 없었고 (슬리퍼가 제공되지 않으면 양말을 사용하겠지만) 슬리퍼가 있어서 양말도 특별히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B사에서 제공하는 품목들은 A사에게는 없지만 나에게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둣주걱은 달랐다.
나의 비행 루틴에 따르면 신발은 반드시 갈아 신게 되는데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부은 손가락을 사용하며 쓸리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무척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구둣주걱을 사용하게 되니 이러한 불편함이 싹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구둣주걱은 나의 비행 경험을 완성하는 최적의 품목이었던 셈이다.
긴 이야기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내가 비행을 하는 전체적인 경험을 더 세심하게 고민하고 필요한 품목을 챙겨주었다고 느껴지는 딱 그 순간. 그 순간 내 삶의 질이 더 나아졌다고 느껴졌고,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손이 쓸리는 약간의 불편함마저 없애 주는 구둣주걱이라는 아주 사소한 차이. 그것이 나의 비행을 가장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한 매우 결정적인 사소한 차이였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 어메니티 파우치에 들어갈 품목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것일까?
몇 년 전부터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제는 어디에나 붙일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서 제공하기만 하면 고객들이 구매하는 시대는 끝났다. 고객이 새로운 경험을 하는데 제품과 서비스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감성적인 접근이 매우 중요한 시대인 것이다. 제품 구매 후 사용한 경험뿐 아니라 구매 이전부터 구매 단계 전반에 걸친 나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드는 “경험”이 강조되는 것이다.
“어디 가진 것을 보여줘 보시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돈값을 하는 경험을 제공받기를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내가 지불하는 돈의 가치에 맞는 것을 보여달라며 여유있고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쉬운 위치에 있는 것이다. 십수년 전만 해도 천재적인 사업가들이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제품과 서비스로 고객을 휘어잡던 시대와 비교해보면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반대의 입장, 즉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개념이 "고객 경험"이 아닐까? 과거와 달리 지금의 소비자는 소비자층으로 군집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취향이 있는 개개인들이기에, 하늘의 별보다 많은 개개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족시킬 ‘경험’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접근법을 이번 여행에서 살짝 맛을 본 것 같다. 몇 번의 비행을 마친 후 ‘어떤 기준으로 어메니티를 정했을까’라는 나의 질문은 “누구였을까, 내 마음을 읽은 사람은?”으로 바뀌었다.
막막하고 어려웠던 고객 경험에 대한 접근은 직접 고객이 되어 보는 것으로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항공사 입장이 아닌 탑승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지는 보다 분명해질 테니 말이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다시 말해 입장을 바꿔보는 접근이 여기서도 필요한 태도이지 않을까?
경쟁자도 제공하고 있는 동일한 것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노력보다, 상대에게는 없지만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아주 사소한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쩌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여행 루틴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게 도와주는 작고 사소한, 구둣주걱 말이다.
그러나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관점을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휙휙 바꿔본다는 것은 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그들의 입장이라면 무엇을 원하고 기대할까?"
막상 내 일이 되니, 말로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가 새삼 더 느껴진다. 교육생의 고객 경험을 알아내기 위해 혼자 계속 저 말을 중얼거리는데, 무언가 시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되어 본다>라는 것은 정확히 그 입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만일 탑승객의 입장이라면 무엇이 필요할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는 노력만 했다면, 저 작은 구둣주걱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된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것은 어쩌면 추측에 가까울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마음을 읽으려는 것보다 어쩌면 진짜 탑승객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진짜 그 사람이 된다면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을 찾을테니 되어보는 것과는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요즘은 유투브를 보면 예전 블로거의 생태계보다 훨씬 다양하고 치열하게 여행 전문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영상 속에서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툭툭 던지듯 하는 말들에 집중해보면 진짜 탑승객, 여행하는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한지가 분명하게 보인다. 이들은 누군가의 입장에서 경험담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탑승해보고 경험해보고 느낀 것 그대로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짜 그 입장이 되는> 접근이야 말로 고객 경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애매모호한 개념에 휘둘려서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내 경험을 통해 아주 가까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단순하지만 오래된 진리인 것 같다.
<되어 보려는> 노력 말고, <진짜 그 입장이 되는> 것. 나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지 말고, 실제 상대방의 입장으로 나를 던져놓고 진짜를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 필요한 것은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