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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중 김범순 Oct 14. 2024

사는 게 즐겁다

18.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

사진 출처 :  고은별 인스타그램


한 사장을 배웅하고 현관문을 닫자 앞 베란다 수납장에 숨어있던 아들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엄살을 떨며 뛰어나와 같잖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흥, 달달 봉사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

  “엄마하고 같이 사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그 비위 맞추며 사느라고 엄마도 고생이 참 많더라.”

  “그래, 고생이 많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데? 다 너 때문이잖아!”

 아들은 이내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엄마,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합시다. 선택은 엄마가 했어. 내가 언제 달달 봉사 한 씨랑 살라고 했는데?”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믿은 내가 미친년이지!”


김 여사는 아들 옷을 집어던지며 당장 가라고 했다. 아들은 냉큼 건넌방으로 들어가 미어지게 문을 닫고 달칵 잠갔다. 


처음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집안으로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아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주말을 고스란히 보내고도 가지 않았다. 지난 번은 어찌어찌 기분을 풀어 보냈지만 한 사장은 보통 예리한 사람이 아니다. 아들 데리고 있다 들키면 당장 쫓겨난다. 

김 여사는 한 사장 부인한테 보낼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보고 돌아오는 길에 백만 원만 찾았다. 


한 사장 집에서 한 달에 삼백오십만 원씩 세 번이나 받은 김 여사였지만 남은 건 백만 원뿐이었다. 선희와 미숙한테 빌린 돈 갚고 명품 가방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아들에게 이백만 원을 주며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다시는 오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 


서른다섯 아들은 일곱 살짜리처럼 팔짝팔짝 뛰며 김 여사를 얼싸안고 춤을 췄다.


  “알았어요. 엄마 사랑해. 나는 엄마밖에 없어. 고마워요!”

 

김 여사는 아들이 가고 나면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그 허전함과 서글픔은 사흘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김 여사는 아들이 입었던 한 사장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언제나 이런 집에서 걱정근심 없이 아들 며느리 손자와 살아볼까? -


핸드폰이 울렸다. 


넋을 놓고 있던 김 여사가 누군지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기분도 그렇고 해서 안 받으려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힘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둑년!”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였다. 하도 전화를 안 받으니까 다른 사람 전화로 건 모양이다.


뭐 도둑년? 칼만 안 들었지 너야말로 날강도다! 이렇게 맞서며 피 터지게 싸우고 싶었지만 나긋한 목소리로 송금하려고 엘리베이터 탔는데 이러시면 섭섭하지요 하고 말았다. 


한 사장한테 일러바쳐 소개비를 몽땅 떼어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빗발치는 독촉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미루어 오던 소개비를 오전 11시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어제 왔다 간 한 사장이 또 와서 못 보낸 것이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한 사장은 밤낮 가리지 않고 수시로 들락거렸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는 한 사장 집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면 소개비 백만 원에 월 오만 원, 살림을 차리면 삼천만 원에 월 이십만 원, 안주인이 되면 월정액 없이 이억만 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제와서는 요양보호사와 살림 차린 것 두 가지를 합친 삼천백만 원에 소개비 미룬 대가로 월정액 오만 원씩 열두 달 육십만 원과 이십만 원씩 열두 달 이백사십만 원까지 삼천사백만 원을 내라고 빗발치듯 독촉했다. 


김 여사가 요양보호사 소개비와 월정액은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살림 차린 지 6개월도 안 됐는데 왜 1년 치를 내라느냐며 이백팔십만 원은 죽어도 못 내겠다고 버텼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는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협박했다. 


  "한 푼이라도 적게 보내면 한 사장한테 꽃뱀인 네 정체를 밝힘과 동시에 젊고 예쁜 여자를 붙여 내쫓게 만들어 버린다!" 


김 여사는 떨리는 손으로 현금 인출기 버튼을 눌렀다. 



19. 물거품


사진 출처 : 이춘형 작가 - 속초 앞바다 


김 여사는 이백팔십만 원을 고스란히 바친 게 아깝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백화점 안을 몇 번씩 오르내려도 분이 풀리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자 낯선 남자 신발이 흐트러져 있다. 


도둑이다! 


아니었다.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이 와 있었다. 첫날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또 후회했다. 


애틋하던 마음은 간데없고 분노가 치솟았다. 안방 침대에 널브러져 자는 아들을 두들겨 깨웠다. 잠을 자도 왜 하필 안방에서 잔단 말인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정말!” 

  “사흘 만에 본 아들한테 이렇게 매정한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어? 너무한 거 아냐? 

  “빨리 안 일어나?”

  “내가 돈 잘 벌어 봐. 매일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난리 칠 거면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내일이라도 대박 나서 엄마 호강시켜 주게 될지 어떻게 알아?”


아들은 아침저녁으로 손을 벌렸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고 싶었지만 한 사장이 수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 아들은 한 사장이 와도 숨지 않았다. 심지어는 한 사장이 식탁에서 밥을 먹어도 마음대로 주방을 들락거렸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도 소용없었다. 


그날도 한 사장이 밥을 먹고 있는데 맞은편 의자에 떡하니 앉았다. 김 여사가 입속말로 빨리 일어나 들어가라고 했다. 아들은 봉사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난리냐고 되레 인상을 썼다. 김 여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화를 삭이자 혀를 내밀어 약을 올렸다. 이상한 기색을 감지한 한 사장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어디 아파, 왜 그래?”


김 여사가 얼른 명치를 누르며 요즘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했다. 한 사장이 얼른 김 여사 손바닥 한가운데를 깊이 눌렀다. 아야! 김 여사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자 단단히 체한 것 같다고 했다. 한 사장은 운동 부족이라며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꾸준히 다니라고 했다. 


아들이 병신 꼴값한다며 비웃었다. 


김 여사가 빨리 방으로 들어가라고 또 손짓했다. 아들은 도리질을 치며 계속 약을 올렸다. 이래 보여도 다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니까 아들이 입속말로 정말? 하며 한 사장 눈앞에 손바닥을 대고 흔들며 이것 보라고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고 했다. 


김 여사는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김 여사가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아들은 즐거워했다. 


드디어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여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아들은 그대로 한 사장 가까이 가더니 주먹을 쥐고 한 사장 얼굴에 강펀치 날리는 시늉을 했다. 


  “너, 이 자식!”


한 사장이 벌떡 일어나 아들 손목을 틀어쥐었다. 아들과 김 여사가 동시에 비명을 올렸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한 사장은 문밖으로 아들을 끌어냈다.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는 김 여사도 야멸치게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김 여사가 울면서 계속 문을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들은 쪽팔려 죽겠다며 얼른 비밀번호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지은 죄가 워낙 커서 그럴 수 없었다.


  - 띵! -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났다. 주차장에서 대기하던 박 기사일 것이다. 


김 여사는 얼른 아들을 데리고 비상계단으로 숨었다. 문이 여닫히고 한동안 발걸음이 어지럽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김 여사가 분통을 터트리며 아들 등짝을 마구 때렸다. 


  “내가 한 사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누누이 말했지? 너, 이 길로 당장 가. 안 그러면 엄마 진짜 쫓겨나!”


아들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아파트 광장에 한 사장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김 여사는 현관문 번호를 눌렀다.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바꾼 것이다. 


카드도 없고 전화기도 없고 내복은커녕 겉옷도 없고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의 김 여사였다. 비밀번호가 될 만한 한 사장 가족 생일이나 기념일을 모조리 동원해 봤지만 허사였다. 


김 여사는 그제야 쫓겨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속 시원하겠다. 이놈아!”


김 여사가 분풀이를 하려고 돌아보니 아들은 고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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