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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중 김범순 Oct 14. 2024

사는 게 즐겁다

20.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어

사진 출처 : 양지안 인스타그램


침울하게 차창밖만 바라보던 한 사장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박 기사.”

  “네, 사장님.”

  “저 집 부동산에 내놓게.”

  “재개발되면 열 배 넘게 오를 텐데요?”

  “사람도 잃고 사는 마당에 이익 좀 덜 보면 어떤가.”

  “알겠습니다.”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었던 김 여사였다. 그런 김 여사를 맨몸으로 쫓아내는 일이 벌어지다니! 한 사장은 체면만 아니면 엉엉 목 놓아 울고 싶었다. 목소리 곱고 손목 굵은 여자는 좀체 만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좋아지던 김 여사였다. 


김 여사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한 사장은 김 여사가 쓰고 있는 카드 사용 내역을 훤히 알고 있었다. 


물건 사는 것은 얼마를 써도 괜찮은데 어느 날 백만 원이 출금되었다. 이해할 수 없어 박 기사한테 알아보라고 했다. 아들이 드나든다고 했다. 드나드는 것으로 모자라 돈까지 건넨 것이다. 하지만 김 여사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돈 건넨 것이 찜찜했으나 김 여사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든든할 테니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10년 전. 한 사장은 첫 번째 탄탄이를 보낸 허전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들였다. 


목소리 곱고 손목 굵은 여자들과 만나기는 했지만 살림을 차린 것은 처음이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한 어린 여자였다. 힘들거나 골치 아픈 일이 생겨도 여자와 함께 있으면 금방 풀리고 지상낙원이 되었다. 꿈같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났다. 


언젠가부터 여자한테서 찬바람이 돌았다. 가장 곤란한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에 못 가게 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당신한테 뭐예요. 도대체 뭐냐고요?”


자식을 낳아 기를 것도 아니고 하루살이 같아서 싫다는 것이었다. 한 사장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니까 아파트라도 자기 명의로 해줘야 결속력이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하니 그럴 것도 같아 기꺼이 들어줬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다시 사과처럼 상큼해졌다. 


오래잖아 여자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얼굴을 만져보니 반쪽이 되어 있었다. 


  “도무지 사는 게 의미 없어 우울하고 무엇보다 혼자 지내는 밤이 무서워 죽을 것 같아요.”


여자는 불면증이 심해 정신과를 들락거렸다. 한 사장은 환자를 두고 도무지 발걸음이 안 떨어져 가끔 집에 가지 못했다. 여자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입원할 지경에 이르렀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여자가 한 사장 손을 잡고 울면서 애원했다. 


  “부인과 이혼하고 내 곁에만 있어줘요!” 


얼마나 여위었는지 굵직하고 탄탄했던 손목이 아내 손목처럼 가늘어졌다. 이러다 사람 하나 죽이겠다 싶어 그러겠다고 했다. 여자가 한 사장 손에 까칠해진 입술을 비비며 고맙다고 했다. 


한 사장은 박 기사한테 아내와 법적으로만 헤어지겠다며 빨리 이혼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 하루! 이틀! 사흘! 언제 여자 숨이 달칵 멈출지 몰라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데 박 기사는 이혼서류를 가져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한 사장이 출근길에 다그쳤다. 


  “박 기사. 사람 죽게 생겼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열흘이 다 돼 가는데 왜 서류 안 가져와? 안 되겠어. 이 길로 내가 직접 법원으로 가야겠네!”


박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사장님. 이혼을 보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두꺼운 한 사장 목이 노기등천해서 시뻘게졌다. 박 기사가 한사장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말했다.

  “사장님께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 이혼 절차 밟으라고 말씀하신 다음날 피카소 호텔 안마시술소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박 기사가 나 몰래 그 친구를 왜 만나?”

  “그 사장님 이혼했다 재결합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피카소 사장님이 큰일 났다고 태산같이 걱정하십니다.”

  “그 친구가 왜 내 걱정을 해?”

  “불쾌하시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님께서도 뚜쟁이가 보낸 꽃뱀한테 물리셨답니다.”

 

한 사장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천박한 명칭을 써! 엉?”

  "죄송합니다!"


여자는 천사처럼 여리고 착해서 그런 부류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당장 박 기사를 해고해야겠다. 차를 사면서 박 기사와 만났다. 20년 동안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이고 박 기사 아니었으면 이렇게 성공할 수 없었다. 박 기사와 헤어진다? 박 기사 없으면 손발을 묶인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사장이었다.


죽어도 여자와 헤어지기 싫었고 박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장은 어렵사리 분을 삭이며 여자가 꽃뱀이 아니라는 사실을 박기사한테 확인시키고 싶었다. 한 사장은 잔뜩 잠긴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다스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이혼한 놈이 잘 지낼 턱이 있냐?”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다. 너 혹시 장애인 가정만 파탄 낸다는 뚜쟁이 이름이 뭔지 아냐?”

  “아, 그 교활한 암 너구리? 설마 너도 걸려들었냐?” 

한 사장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여자가 소속감 없다고 자기 명의로 집 사 달라지? 집 사고 나니까 무섭다며 집에 못 가게 하고. 그러다 나중에는 죽을 것 같으니까 이혼하고 옆에 있어 달라지? 그게 바로 꽃뱀 조종하는 정상미 수법이야!”


정상미?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한 사장이 마음을 다잡고 힘없이 물었다.


  “그렇게 잘 알면서 너는 왜 이혼했냐?”  

  “나도 몰랐으니까. 이혼한 뒤 피카소 사장한테 듣고 알았다.”


언젠가부터 여자가 정상미라는 사람한테 매월 같은 액수의 돈을 보냈다. 한 사장이 누구냐고 묻자 혼자 사는 엄마한테 용돈을 보낸다고 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한 사장은 눈에 띄게 핼쑥해지며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 기사 고맙네!”

  “제 충심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잘 모시겠습니다!”



21. 미처 몰랐네


사진 출처 : 고은별 인스타그램


닷새 전이었다. 


딩동! 한 사장의 핸드폰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김 여사가 뭔가를 샀거나 아들한테 주려고 또 출금한 것 같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기계음을 들었다. 


  - 오후 3시 57분. 정상미에게 삼천사백만 원 송금 -  


한 사장은 순간 뇌 속의 신경이 삐- 소리를 내며 암전 상태가 되었


한 사장은 고객이 추천한 단골 식당 미숙이라는 찬모를 통해 김 여사를 소개받았다. 그랬는데 김 여사가 어떻게 정상미를 안단 말인가? 게다가 거액의 돈까지 보냈다.


정상미는 한 사장네 요양보호사가 그만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아는 사람이었다. 그때 마침 건너 건너 소문을 듣고 미숙이 김 여사의 입주 요양보호사 취업을 의뢰했다. 정상미는 수족처럼 부리는 남자 하수인에게 매일 한사장한테 안마시술을 받으라고 했다.


한 사장은 김 여사가 세련된 분위기의 여자들과 전혀 달라서 좋았다. 기분을 감출 줄도 몰랐으며 나이도 많고 촌스럽고 집을 사달라거나 아프다는 연기도 하지 않아 철석같이 믿었다. 


김 여사도 박 기사처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한 사장이 김 여사의 정체를 몰랐던 것처럼 김 여사도 한 사장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었다. 


한 사장은 전맹이 아니었다. 


감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시신경을 많이 다쳐 오른쪽 눈은 실명했지만 왼쪽 눈은 초고도 시야장애를 입었다. 한 사장은 무엇을 보려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어렵사리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간신히 초점이 맞으면 물결치는 것처럼 흐릿하게 바늘귀만큼의 사물이 보였다. 


그래서 항상 한 사장 눈이 형형하게 빛났고 아들 팔뚝을 단번에 휘어잡을 수 있었다. 


오늘은 박 기사 지휘 아래 김 여사와 여섯 달 동안 달콤하게 살았던 살림이 치워지고 있을 것이다. 


한 사장은 안마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 결근했다. 아내에게 몸살이 나서 쉬어야겠으니 온종일 내버려 둬 달라 부탁하고 손님방에 가서 누웠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한 사장은 김 여사와 헤어져 뼈가 갈리도록 아픈 것이 죗값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여자를 거느릴 능력이 있는데도 조강지처를 끝까지 책임졌으므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노라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세 시간도 안 됐는데 아내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며 일갈했다.

  "결국 이렇게 탈 날 줄 알았어!”

한 사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배 아빠. 눈에 띄게 너무 슬퍼하는 거 아니야? 나도 사람이야.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고!”


아내가 어떻게 알고 저러지?

박 기사가 말했나? 

아니다. 

박 기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한테는 김 여사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고 이튿날 김 여사 아들로 둔갑시킨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하여금 짐을 챙겨가게 했다. 


혹시 김 여사가 보낸 음식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김 여사가 그만둔 지 이틀도 안 돼 아내는 김 여사가 만든 음식이 먹고 싶어 못 살겠다며 솜씨 좋은 요양보호사를 채용하자고 했다. 나흘 뒤 찬모 경험이 있는 요양보호사가 왔다. 한 사장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김 여사는 언제 퇴원하느냐고 빨리 데려오라고 보챘다. 


한 사장은 어느 병원에 있는지 모른다며 김 여사와 고향이 같은 유명한 요리연구가 홍성애와 계약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아내도 그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한 사장이 홍성애와 통화한 뒤 아내에게 전화기를 넘겨 원하는 음식 종류와 맛의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게 했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한 사장 부인이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한 사장이 퇴근한 뒤에 말해 다음 날 오후에 배달받았다.


한 사장 부인이 주문한 메뉴는 그대로 김 여사에게 전달되었고 요리 연구가가 만든 음식은 안마 시술소 직원들이 먹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알고 저럴까? 엎친 데 덮치더라고 기둥처럼 든든한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면 그야말로 끝장나는 것이었다. 급기야 아내가 소리쳤다.


  “나하고 보배는 당신한테 어떤 존재야? 엉?”


한 사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내가 용서해 줄 때까지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아내가 따발총 쏘듯 말했다.


  “탄탄이 간 지 여덟 달 넘었어. 여태까지 이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뭐야, 김 여사가 아니었어? 

휴-!  

한 사장은 슬며시 다시 누웠다. 


한 사장 부인은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문이 부서질 만큼 세게 닫았다. 


김 여사와 헤어졌다고 출근도 안 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당장 이혼해!

 

이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탄탄이로 바꿔서 퍼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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