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

전설적인 바이올린 제작자

by 델알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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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



아무리 평생을 바쳤다 해도,
천 개가 넘는 악기를
온전히 혼자 만들어냈다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스트라디바리 가문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 가운데
비교적 분명한 부분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려 합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는
1644년 또는 1645년에 태어나
1665~66년경부터
독립적인 바이올린 제작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 아내인
프란체스카 페라보스키와 사이에서
프란체스코(Francesco, 1671년생),
오모보노(Omobono, 1679년생) 등
여러 자녀가 태어났고,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을
작업장에서 함께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프란체스카가 세상을 떠난 뒤,
안토니오는 안토니아 마리아 잠벨리와
재혼하며 또 다른 자녀들을 두게 됩니다.

이 자녀들 가운데
제작적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장남 프란체스코였습니다.


특히 1714년에 제작된 ‘Soil’을 비롯해
‘Viotti’, ‘Sarasate’, ‘Alard’와 같은
황금기(Golden Period)의 걸작들에는
프란체스코의 손길이 닿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1684년경,
열세 살 무렵부터 견습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는 ‘Bonjour’, ‘Visconti’, ‘General Kyd’와 같은
첼로들이 제작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스트라디바리 스타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아가던 이 시기,
퍼플링(purfling)과 같은 섬세한 장식에서는
여전히 안토니오의 손맛이 드러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프란체스코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그 안에 녹아들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오모보노는
형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1692년경부터 훈련을 받았지만,
1698년에는 나폴리로 떠났고
이후로는 주로 악기 셋업, 출장, 납품 등
실무적인 역할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라디바리 가문의 작업장은
매우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B’ 모델(첼로), ‘CV’ 모델(비올라),
‘P’, ‘PG’, ‘G’ 모델(바이올린) 등
다양한 몰드(mold)가 동시에 사용되었고,
이는 여러 장인들이
동시에 악기를 병행 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프란체스코는 단순한 조수가 아니라
제작의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흐름에 젊은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노
(Giovanni Battista Martino)도
함께했을지 모릅니다.


조반니는 스트라디바리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작업장 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고,
1716년에 제작된 ‘Messiah’ 바이올린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727년, 스물넷의 나이로 요절하게 되며
스트라디바리 가문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와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그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는
‘Messiah’는 오랫동안 집안에 보관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730년대 이후 제작된 악기들에서는
스타일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Habeneck’과 같은 작품에서는
f홀의 비대칭, 아치의 무게감 등
이전과는 다른 흐름이 보이는데,
이는 고령의 안토니오가
여전히 중심에 있었지만

실제 제작은 점차
주변 장인들에게 분산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실제 문서들에서도
이러한 공동 작업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도면에 남은 필체들은
안토니오뿐 아니라 프란체스코, 오모보노의
손길도 함께 보이며,

이들이 단순한 조수 이상의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말년의 유언장에서도
두 아들에 대한
안토니오의 인식 차이가 드러납니다.

유산은 아버지 곁을 지켜온
프란체스코에게 집중되었고,

오모보노는 사실상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재산 분배가 아니라
작업장 내 기여도와 관계를 반영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가문의 명맥을 이을 후계자로
프란체스코가 낙점되었고,
오모보노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던 셈입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라 부르는 악기들은,
전설적인 거장 혼자의 작품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이뤄낸
오랜 노력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그 소리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무언가를 품은 듯 특별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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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John Dilworth가 Tarisio에 기고한
“The sons of Antonio Stradivari: part I” (2024년 6월 26일 자)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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